1989년 새해는 국가적으로 중대한 시기일뿐 아니라 우리 교회로서도 뜻깊은 해로 볼 수 있다. 물론 한 해 한 해가 소중하고 의미 있는 해가 아닐 수 없겠지만 처한 현실적 상황을 고려해 볼 때 금년이 더욱 큰 의미를 가진 해로 평가될 수 있다는 얘기다.
먼저 국가적으로는 지난해부터 범국민적으로 불붙기 시작한 민주화의 요구와 염원이 뿌리내려야할 때이다. 이 민주화는 정치 분야뿐 아니라 경제ㆍ사회ㆍ문화전반에 걸쳐 이루어져야할 국민적 과업이다.
우리는 지난해 민주화로 가는 길이 얼마나 험난하고 힘드는 일인가를 뼈저리게 체험했다. 정치민주화의 전제로 내세운 5공 청산이 매듭지어지지 않아 새해벽두부터 다시 거론되고 있고 경제사회 문화 각 분야의 민주화요구도 더욱 거세질 전망이다.
따라서 금년 한 해의 국내 정세는 지난해 못지않게 소용돌이가 예상된다. 여기에다 공산국가들과의 문호개방、그중에서도 남북한 간의 계층 간 접촉을 둘러싼 엇갈린 주장과 이견의 대립으로 혼란과 소란이 예측되기도 한다.
어쨌든 금년에도 각 분야에 걸친 민주화의 목소리와 노 대통령의 중간평가 한반도 주변정세에 대처하려는 정부의 움직임 등을 둘러싸고 파란과 충돌이 불가피하게 보이지만 기왕 내친 걸음을 멈출 수는 없다. 곧 국민 모두가 열망하는 자유민주주의의 뿌리내림이 진통과 아픔을 전제로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결코 그 길을 외면하거나 포기할 수 없으며 인내로써 극복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 길을 가는데 있어 우리국민의 최대 단점으로 지적 받고 있는 성급함과 조급함을 누그려 뜨려야 하겠다. 로마가 하루아침에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교훈을 우리의 산 교훈으로 만들어야할 것이다.
그리고 국가나 국민을 위한다는 구실아래 당리당략이나 특정지역 특권 소수를 위해 권모술수를 일삼는 사이비 정치인들은 대오각성하고 진정 국리민복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자세를 가다듬어야할 것이다. 당파싸움이 결국 나라를 망친 역사의 엄연한 사실을 겸허히 되돌아봐야 할일이다.
이와 함께 대학생들이나 근로자들이 법을 무시하고、폭력을 휘두름으로써 결국은 자신과 공동체 나아가 국가에 대해 파괴와 막대한 재산손실을 끼치고 국익에 위배되는 행동을 서슴없이 해온 과거는 결코 되풀이되지 말아야할 것이다.
지난해까지의 어쩔 수 없었던 불법이나 탈법에서 과감히 벗어나 이제부터는 법질서 속에서 인내와 대화로 악습과 매듭을 하나씩 풀어나가는 슬기와 지혜를 보여주길 간원한다. 또다시 자유와 평등과 인권이 보장되는 자유민주주의를 쟁취하려는 노력이 불법과 폭력으로 성취될 수 있다는 어리석음과 착각은 이제 말끔히 사라져야 할 것이다. 곧 자유민주주의는 그 결과보다 그것을 달성하기까지의 과정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사실을 재삼 강조해두고 싶다. 그 이유는 쉽게 얻은 것은 쉽게 잃는다는 평범한 진리와 함께 뿌리가 제대로 착근(着根)하지 못한 나무는 약한 비바람에도 지탱하기 어렵다는 자연의 순리를 뛰어넘을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 교회로서는 금년이 특별하고도 중대한 의미를 지닌 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우리교회 2백여 년 역사상 처음으로 세계성체대회가 10월5일 서울에서 열린다는 사실이다.
가톨릭교회의 올림픽으로 일컬어지는 세계성체대회가 불과 2백여 년의 일천한 교회사를 가진 한국 땅에서 개최된다는 그 자체 의미도 중요하겠지만、그보다 더욱 고귀하고 값진 의미는 대회가 표방하고 있는「한마음 한몸운동」이라 할 것이다.
한마음 한몸운동은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이신 성체를 자기 몸 안에 모심으로써 그리스도와 한마음 한몸으로 결합되듯이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끼리、그리고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사람들과도 한마음、한몸이 되자는 운동이다.
이 운동을 구체화해서 벌이고 있는 것이 곧 헌혈ㆍ헌미ㆍ결연활동이다. 즉 일생을 오로지 인간구원을 위해 송두리째 바치고 온갖 오해와 미움과 욕설을 단한마디 해명도 하지 않은 채 뒤집어쓰고 죽으시면서까지、그 인간들을 사랑한 나머지 자기 살과 피를 양식으로 내어주신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라가자는 운동이다.
그래서 그리스도처럼 몸을 나누어주고(헌혈)、양식을 나누어주고(헌미)、삶을 나누자(결연)는、참으로 위대하고 성스럽기까지 한 운동을 제창하고 나선 것이다.
이 운동이 본래 취지대로、전 신자들의 적극적인 동참으로 이루어지기만 한다면、한국가톨릭의 모습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르게 새롭게 태어나게 될 것이다. 만일 이 운동이 요란한 구호나 내실없는 외형의 걸치레로 끝나고 만다면 교회의 모습이 달라질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는 이 운동이、점차 알맹이가 허약해져가는 교회내부에 속을 채워주고 구원의 선포가 절박한 이 땅 이 민족에게 등불이 될 수 있기 위해서는 두 가지 전제가 동시에 충족되어야할 것으로 판단한다.
그것은 마음과 정신을 비우는 일과 이를 실천적으로 증거하는 일이다. 곧 나아닌 남과 한마음이 되고 한몸이 되려면 내가 가진 것은 없어야 그렇게 될 수 있을 것이다. 내안에 거짓이 있고、권위가 꿈틀거리고 과욕과 교만이 이글거리고 있는데 어떻게 남과 합치될 수 있겠는가? 비우고 버리는 일은 지도층부터 모범을 보여야한다. 윗물이 맑아야 아랫물은 따라서 맑을 수 있다. 그리고 말하는 것과 행동이 일치되어야한다. 당장 일치가 어려우면 말하는 만큼 행동을 근접시키려는 말하는 만큼 행동을 근접시키려는 노력이 엿보여야할 것이다. 말하는 사람 따로 있고、행동하는 사람 따로 있는 교회라면、이중적이고 표리부동한 물골밖에는 더 보여줄 것이 없을 것이다.
우리는 금년 한해를 참으로 잘 사느냐 그렇지 못한가에 따라 80년대의 교회상을 판가름할 수 있다고 본다. 비록 시작과 중간에 다소의 미비한 점이나 실수가 있었더라도 유종의 미를 거두는 일이 중요할 것이다. 그것은 금년의 성패가 90년대 교회상의 바로미터가 될 수 있다는 예측에서 그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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