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0월 75년도 막사이사이상「국제이해 부문」수상자로 우리 교회의 사제인 페트릭 맥클린치 신부가 결정되었다는 것이 발표되었다. 본보973호에 그 내용이 상세히 보도되었을 뿐아니라, 각 일간지에서도 이 사실이 크게 보도되었으므로 그 내용에 대해서는 다시 재논할필요가없으리라 생각한다.
제주도의 황무지 가시덤불과 자갈밭인 해발 360미터의 고지, 그 광활한 땅 95만여 평(650여 정보)를「젖과 꿀이 흐르는 옥토」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그것은 인간 의지의 승리인 동시에 진리와 더불어 사는 크리스찬의 신념의 소산이며 주님의 길을걷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모습을 보여준 사제의 참다운 모습을 드려낸 것이며, 교회가 가지는 희망의 이유를 밝혀준 크나큰 보람과 영광인 것이다. 그것은 비단 우리교회의 영광일뿐 아니라 우리 국가 전체의 영광이며 자랑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류애를 부르짖으신 주님의 크신 사랑안에서 호흡한 신앙자의 성스러운 모습을 드러낸 전 희망의 등불이기도 한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에서 좀 더 근본적인 문제를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 주님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섬김을 받으려 온 것이 아니라 섬기려 왔고 많은 사람들을 위하여 대속물로 자기 목숨을 내주려 온 것이다』(마르10ㆍ45 마태20ㆍ28) 그러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을 돌보시고 굶주린 자를 먹이셨으며 병든 자를 낫게해 주셨던 것이다. 그것은 주님이 당신의 능력을 자랑하려는 것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가 이 세상에 도래했다는 것을 증거하기 위한 것이었다. 하느님 나라는 원래가 이기적인 행위로써 서로가 이웃을 위해 도움이 되는 삶이 깃든 곳을 뜻한다. 주님께서 하신 행위는 모두가 그런 행위의 연속이며, 우리를 크리스찬에게 요구하는 생활도 바로 그러한 생활이다.
그러한 생활을 실천하기 위해서 옛날부터 우리 크리스찬들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형제애를 발휘하여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자선사업(Charitable Work)이 활발하게 수행되었다.
그런데 그러한 자선행위의 성격은 대부분 자의적이며 주관적인 것이었다. 따라서 그 자선을 받는 사람의 심정이나 인격을 별로 생각해본 일이 없었다. 때로는 조그마한 물건을 자선하고서 무엇보다도 소중한 상대방의 인격을 빼앗는 결과까지도 초래하는 일이 없지않았다.
그렇게까지는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상대방의 사정이나 감정에 대해서 전혀 무지했든가 무관심한 상태로 일방적으로 자기 만족을 위한 자선행위를 해온 것도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그 이유는 대개의 자선사업이 개인의 어려운 사정이나 빈곤, 혹은 고통을 구제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문화가 발달되고 산업구조가 완전히 뒤바뀐 현대, 특히 자본주의 경제체제 하에서 움직이고 있는 사회에서는 필연적으로 여러가지 사회문제가 대두되고 있다 특히 후진성을 지닌 우리 사회에 있어서는 자본주의 경제체제가 아직도 확립되지 못한채, 사회보장제도나 그밖의 여러가지 국가정책의 여건들이 소득 재분배의 균등을 가져오지 못하고 있으므로「부익부 빈익빈」의 현상을 자아내고 있는것도 어쩔수 없는 과도기적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그러므로 우리 교회는 옛날의 초대교회의 사도들이 행한 바와 같이 이른바 봉사역과 분배역을 동시에 원만히 할 수 있도록 촉진시켜야 할 사명이 있다. 그러한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이른바 교회의 사회복지사업이다. 그것은 단순한「개인」에 대한 자선행위가 아니다. 「사회의 전체적 향상과 복지」를 지향하는 내용으로서 전환을 뜻한다.
현재 사회복지사업의 종류나 범위는 현저하게 증가되고 확대돼가고있다. 따라서 사회사업이란『문화적인 현상에 대응하는 국민생활의 양상을 공동체적으로 인도하고 보호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사회적 노력으로 총체를 뜻한다』또한 그 노력은『후진성을 지닌 사회라든가, 사회적 환경을 극복하지 못하고 체념상태에 빠진 사람들의 마음속에 건전한 의욕과 성취에 대한 신념을 넣어줌으로써 경제적 정신적으로 향상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 행위인 것이다』
사실 맥클린치 신부는 침체한 제주도의 개발에 새로운 활력소를 불어넣어 주었으며, 의욕을 상실한 도민들에게 새로운 삶의 희망을 발견케 한 것이다. 이것은 바로 주님의 복음전파와 직결되는 현대적 사회복음화의 첩격이기도 한 것이다.
앞으로 교회는 이와 같이 교회 스스로가 주님의 현존을 보여주는 증거자로 임함으로써 불신과 부도덕이 만연된 사회에 신앙의 싹이 움트게 해야 할 것이다.
맥클린치 신부의 앞날에 보다 큰 주님의 축복과 사랑이 내리시기를 빌면서 더욱더 분발하여 진정 우리나라에 하느님의 모습을 보여주는 증거자로서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 간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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