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을 믿고 따름은 그분을 안다는 데서 출발한다. 그분을 알기 위해 여러 가지 방법이 있겠지만 우리는 자주 그 분의 말씀과 행적을 알아보려는 시도보다는 그저 전하는 사람의 말씀을 수용하는 소극적 방법으로 밖에는 접하지 못함은 현 실정에서 불가피한 상황이라 하겠다. 그러나 여기에서 문제가 제기된다. 즉 소극적 방법으로서의 듣는다는 데에 한계가 있다는 것이다. 바오로 사도는「신앙은 설교를 들음에서 생기고 설교는 그리스도의 명령」(로마10, 17)이라고 갈파하고 있지만 일주일간의 세상사에서 시달리다가 모처럼의 피정이나 뜻밖의 장소에서의 강론은 왜 이리도 진부하고 긴가. 이 길다는 것이 문제다.
물론「강론의 직책은 가장 성실하고 정확하게 수행되어야 한다.」(전례헌장 35)는 공의회의 가르침을 역행하고 싶지는 않지만 모처럼의 피정에서 또 주일미사를 참석하면서 피정시간이나 미시시간 등과 맞추어 약속한 사람과의 시간이 항시「강론 지연」으로 번번히 어기게 되면서 속상해지고 짜증스러워 점점 피정을 빠지거나 미사시간을 기피하는데 능숙해진다는데 있다.
왜 그리 불필요하고 군 더덕의 미사여구와 정부비판이나 돈 문제로 전례시간을 짜증나게 하는지 진정 모를 일이다. 하기사「사제의 의무는 하느님의 말씀을 가르치고 끊임없이 모든 사람을 개심과 성성(聖性)에 부르는 그것이다」(사제교령 4)는 것을 지상과제로 수학하고 나오는 사제들의 심정을 모르는 바는 아니나 적어도 일주일간의 온갖 세속시달림에서 견디어온 뭇 평신도들에게 짧은 시간에 어필할 수 있는 간단명료한 강론으로 신앙심을 총전 시켜 줄 수는 없는지!
그러기위해 많은 연습이 필요하고 지식의 축적과 경험의 소산이 요구되어「계시된 말씀을 환경에 적응시켜 설교한다는 것은 언제나 복음 선포의 원칙으로 지속되어야 한다.」(사목헌장44)는 말씀대로 모든 모임의 강론이나, 피정, 미사강론 등에 적용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어느 신부님의 명언이 생각난다.『사제의 강론이 5분이면 주님이 하시는 말씀이며 10분간이면 신부 자신의 말이고 15분이 넘으면 마귀의 강론이다』는 말씀이.
아! 나도 말이 너무 길어졌나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