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은 세월이 좋아져서 골목마다 가게가 있고 마을마다 시장이 가깝다. 웬만한 집이면 냉장고까지 있어서 매일같이 장을 나가지 않고도 싱싱한 야채나 생선요리를 즐길 수 있다. 그러나 냉장고도 없고 골목가게도 시원치 않고 시장도 멀 뿐아니라 마을이 궁벽해서 닷새장을 기다려 소금에 절인 고등어 한 손을 사오고도 크게 기뻐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제는 며느리보고 손자보신 나의 어머니께서 새색시로 시집살이 하시던 수십년전 옛날이다. 그렇지만 그때는 인구사 오만의 작은 도시에서도 가만히 앉아서 시장을 볼 수 있는 여유와 운치가 있었다.
우선 새벽에는 두부장수와 콩나물장수가 골목을 누비며 지나갔고 아침나절엔 무우 배추장수가 김치거리를 가지고 동리 꼬마들의 숨바꼭질 놀이에 끼어들었다. 김치를 담그고 난 한나절 칭얼대는 아가를 젖물려 한잠 재우고나면 오이 수박 도마도장수가 잠시 조용하던 골목길을 왁자하니 떠들고 지나갔다. 수박은 우물에 채워두고 오이와 도마도는 찬광안 바람채는 땅바닥에 빈쌀섬을 깔고 놓아두는게 보통이었다. 이때쯤이면 국민학교에 갔던 내가 대문을 박차고 들어오는 시간이었다.
『엄마! 학교에 다녀왔습니다』앞마당을 건너질러 대청마루로 오는것도 뛰기 때문에 빈 도시락이 가방속에서 쩔렁쩔렁 젓가락 소리를 낸다. 그것은 엄마의 귀에 내 배가 출출하다는 신호처럼 들린다.
안방 다락에서 유과(油菓)를 내다주며『손발 씻고 이거먹고 그리고 숙제 다한 뒤에 밖에 나가 놀아라』이렇게 이르는데 골목에는 또 그 청승맞은 굴장수가 목청을 뽑는다.
『석화 사아려! 새우젓! 』
이 굴장수가 동네에 처음 찾아왔을때는 동네아낙네들은 아무도 석화(石花)가 굴이라는 것을 몰랐었다. 「굴」이란 말보다 「돌꽃」이라는 뜻의 석화가 더 멋진이름이라고 남이야 알아듣건말건 석화사라고 외친다는 풍류의 굴장수 비쩍 마르고 볼품없이 못생긴 내가 쪼르르 따라나가도『그 놈 참 잘생겼다. 몇 살 먹었니?』
이렇게 얼레발을 치는통에 굴 퍼담는 사발이 골춤해도 더 달라는 소리도 못하고 엄마는 기분이 좋아서 들아서곤 하였다. 굴 사발을 찬장에 넣어두고 부엌을 나오는 엄마앞에 낯익은 단골 기름장수가 오랜만에 찾아오는 모습도 가끔 볼 수 있었다. 그 기름장수는 기름은 팔지도 않고 그냥 얘기만 하다가 밥 한술을 얻어먹고 돌아가기도 했다.
그때의 장사꾼들은 모두 이렇게 훌륭한 배달꾼이요 정이 흐르는 이웃이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저녁마다 장바구니를 들고 주부들이 혹은 식모들이 종종걸음을 치기 시작한 것은…. 「참기름」장수가「진짜 참기름」장수로 되더니「순 진짜 참기름」장수로 바뀌고 다시「정말 순 진짜 참기름」장수로 변할 무렵이었는가? 아니면 참깨를 사가지고 기름가게로 직접 짜러나가는 풍습이 생긴때부터인가? 아니면 텔레비전 냉장고 세탁기가 집안에 들어오기 시작한때부터인가?
아니다. 과자이름은 서양말로 붙이고 미녀대회에는 서양맵씨의 처녀들이 벌거벗고 무대위에서 교태를 짓던 때부터일 것이다. 아니다. 그것은 내가 아버님께 어머님께 세배드리기가 쑥스러워 쭈뼛거리던 때부터일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다짐한다. 석화장수가 다시 우리집 골목에 나타나 그 구성진 목청을 뽑아대면 나는 허옇게 세어나가는 머리털도 아랑곳 하지않은채 색동저고리를 만들어 입고 아버님 어머 님앞에 공손히 세배를 드리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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