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의 우리사회를 두고『사람이 사람대접을 못 받고, 사람다운 사람을 보기도 어렵게 됐다』고 개탄하는 말을 흔히 들을 수 있다. 이런 말을 자주 듣게 되면서부터 필자는 새로운 버릇을 하나 가지게 되었다. 즉 이런 종류의 한탄을 들을 때마다 그들이 무엇을 두고 사람답지 못한 대접이라고 말하는지를 알아내려고 매주 주의 깊게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 그러는 동안 차츰 사람들이 어떤 경우에 스스로 흔히 사람대접을 못 받았다고 느끼게 의직(意職)되는지를 알게 되었다 그것은 엄청난 일이나, 심각한 논쟁이 필요한 대단한 사고가 아니며, 오히려 매우 사소한 원인이 대부분이었다.
인간의 존엄성이 무시 되었다고 고고한 논리로 비판하는 경우에도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원인은 사실상 대단치 않는 간단한 실수에 있음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경우에 있어서 상대방을 가볍게 보는 태도가 가장 흔히 발견되는 원인이며 그것은 반말로 나타난다는 것도 알 수 있었다. 그 후로 우선 나부터 모든 사람에게 존대어를 쓰기로 단단히 결심하고 실천에 옮겨 보았다. 그러면서부터 전에는 무심히 넘겼던 일에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다. 한번은 시내에 있는 지하 유료 주차장에 차를 세워두려 들어가면서 주차장의 수위 겸 안내를 맡아 보고 있는 젊은 사람에게 빈자리가 있느냐고 깍듯이 존대어로 물었더니 그는 퉁명스러운 어투로 뒤쪽에 가라고 반말로 대답하였다. 정당한 요금을 지불하고 주차장에 차를 세우려는 내가 이런 봉변을 당해야 할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 말 없이 차를 세워두고는 볼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와서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내가 반말을 들을 만한 일을 생각해 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며칠 후에 시간을 내어 다시 그 주차장을 찾아가, 이번에는 시험 삼아 큰 목소리로 그것도 일부러 굵직한 소리로 예의 그 주차장 수위에게 반말로『야! 자리 하나 있나?』하고 호기 있게 물었더니, 이번에는 그 수위가 허리를 굽신거리며『예, 사장님 왼쪽 뒷줄에 세우십시오.』하며 친절히 대답하는 것이 아닌가. 이러한 현상은 우리 생활 주변에서 얼마든지 경험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이유가 어디에 있으며 그 원인이 무엇인지는 장황한 설명이 필요 없을 것이다. 그 깊은 원인은 우리의 유교적 윤리의식에 있다. 우리사회는 오랜 세월 동안 신하가 임금에게 아내가 남편에게, 자식이 부모에게 등등과 같이 아랫사람이 윗사람에게 해야 할 행동을 규제하는 윤리의식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세월이 흐르는 동안 유교적 원칙, 즉 유교의 윤리규범에 맞는 행위를 하는 사람은 곧 아래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낳았다. 그것이 인습화하여 예의바른 사람은 아래 사람이며, 나아가서는 약한 사람이라는 사고방식이 굳어졌다. 이것은 확실히 윤리의 퇴화라 하겠다. 윤리규범은「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을 주는 것이지「저 사람이 나 보다 강한가 아니면 약한가? 」라는 이기적인 판단을 위한 기준은 아니다.
윤리적 규범이 이렇게 퇴화하면 자연히 나에게 존대어를 쓰는 사람은 나 보다 아래이며 따라서 나 보다 약한 사람이라는 생각이 모르는 사이에 굳어지고 그 결과 앞에서 말한 주차장의 수위와 같은 행동양식이 나타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확실히 사회와 개인들이 앓고 있는 중병이다. 왜냐면 친절과 겸손이 평화로 이어지는 길이 못 될 뿐 아니라, 이 병은 남의 친절과 겸손까지 시들게 하기가 십상이기 때문이다.
상대방에게 존대어를 사용한다는 것은 상대방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나의 동료임을 존경한다는 의미를 가지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중심은 사랑의 계명이며, 그것은 원수까지 포함한다. 즉 원수가 없는 사랑이다. 왜냐면 사랑을 받는 원수는 이미 원수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사회는 이제 사랑의 첫걸음부터 배워야할 필요가 있는듯하다.
그것은 우선 나와 더불어 함께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을 나와 같은 사람으로 인정하고 사람다운 대접을 하는 것과 아울러 남이 나에게 사람다운 대접을 할 때에 그 사람다운 대접을 정당하고 옳게 받아들이는 것부터 배워야할 것 같다. 남이 나를 사람답게 대접할 때에 스스로 우쭐하여 상대방이 나보다 아래라든지 약한 듯이 되돌려 대접하면 세상은 삭막해지며, 평화와 대화가 살아날 수 있는 바탕마저 무너지기 마련이다.
이 같은 병을 우리는 사회에서 뿐 아니라 가정에서·부부간에·부모와 자식사이에·성직자와 신자사이에·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도 가끔 볼 수 있다.
상대방에게 존대어를 사용하고, 또한 나에게 존대어를 사용하는 모든 사람들을 나와 꼭 같은 귀한 존재로 대접한다는 것이 곧 진정한 이웃사랑이다. 왜냐하면 내가 상대방을 사람답게 대접하고 또 상대방이 나에게 베푸는 사람다운 대접을 옳게 받아들임으로써 상대방과 나는 다 함께 사람다워지는 것이며, 너와 내가 사람다워질 때에 너와 나 속에 숨겨진 하느님의 모습이 세상에 나타나는 것이다. 이것이 곧 우리가 매일같이 외우는「하느님의 나라」가 임하시는 것이며「하늘에 계신 아버지의 뜻」이 세상에 이루어지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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