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덤 곁을 지나거나 멀리서 바라보기 만해도 섬뜩하고 무서워하던 내가 이번 추석을 준비하면서 갑자기 『내 어머니 무덤에는 이미 내 몸의 일부가 묻혀 있는 게 아닐까? 내가 잉태되는 순간부터 열 달 동안을 키워지고 기지개 펴며 안식을 취하던 나의 집이 거기에 있으니…』하는 엉뚱한 생각을 하면서 당장이라도 내 어머니 묘소에 달려가 입 맞추고 싶도록 깊은 애정을 느끼게 되였다.
시집 온지 얼마 안 되어 남편과 함께 미국으로 떠나 십여 년을 지내고 돌아오니 빠듯한 살림에 조상까지 모셔야했던 시어머님께서는 기다렸다는 듯이 맏며느리인 나에게 당신이 힘겹게 지냈던 무거운 짐들을 선뜻 건 내 주셨다.
피난도 중 다섯 자녀를 남기고 돌아가신 내 남편의 친어머님과 그 후로 세 동생을 낳으시고 내가 결혼하기 전에 세상을 떠나신 둘째 어머님, 이렇게 두 시어머님을 위해 추석과 정초에 두 번 차례를 지내는 우리집안은 이제 시 아버님과 시 동생을 제외하고는 모두 가톨릭신자가 되어 작년부터는 종전의 차례예식에 앞서 성서 봉독과 기도 그리고 성가를 부르면서 더욱 부드럽고 경건한 차례분위기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며칠간 어머니 사랑을 깊히 묵상하며 지내던 나는 먼저 가신 두 시 어머님께 대하여 아직까지 한 번도 가져보지 못했던 무한한 사랑과 감사의 정을 느끼며 처음으로 두 분 앞에 정성껏 큰 절을 올렸다.
추석날밤 나는 번번이 큰일을 치루고 나면 되살아나는 감정-형제들이 집안일에 조금만 적극적인 자세로 협조해 준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아쉬움 내지 불만 때문에 쉽게 잠이 오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전과는 달리 나 스스로에게는 아무런 잘못이 없었나를 반성하고 있었다.
일 년에 두 번 장롱 깊숙이 넣어두었던 두 어머님의 사진을 습관적으로 꺼내 보긴 했지만 그 때는 유독 두 어머니께서 몰라보게 변해가는 자손들과 때로는 낯선 새 식구를 맞이하시는 기쁨으로 얼마나 이 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계실까 하는 생각으로 가슴이 뭉클해 옴을 느꼈다.
어머님께서 라면 자녀들이 특별히 좋아하던 음식이 무엇이 었나 기억을 더듬어가며 온갖 정성을 들여 기쁜 마음으로 음식을 장만하시겠지. 그런데 나는 이제까지 흠 잡히지 않도록 형식만을 갖추는 차례준비를 하였기에 기쁨보다는 부담감이 더 컸었고 사랑이 없었기 때문에 의무를 다했다는데 대한 만족만을 느끼지 않았던가.
앞으로는 며느리의 입장이아니라 어머님께서 우리를 위해 준비하시는 사랑의 마음으로 차례에 임해야지.
그래서 오랜만에 식구가 모두 한자리에 모여 맛있게 먹고 옛 이야기하며 즐기는 모습을 보고 흐뭇해하실 어머님들께 언짢은 일일랑 보여드리지 말아야지.
이렇게 마음먹고 보니 오랜 응어리가 풀리는 듯 꽉 막혔던 숨통이 터지는 듯 기쁨이 마음속에서 솟아나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내 남편과 그의 형제들에게 그들이 갈망하던 어머니의 사랑을 내가 먼저 주려고 노력하며 살아간다면 나와 우리 집안의 평화는 하느님께서 꼭 지켜 주리라는 확신도 얻게 되었다.
내게 맡겨진 맏며느리의 십자가는 더 이상 내게 무거운 짐이 아니요 하느님께서 내게 주시려는 은총의 서곡이었음을 깨닫는 순간『혜(惠)야 이제 그만 자려므나』하시며 주님께서 손수 내 이불을 꼭꼭 덮어주시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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