쪽진 머리에 하얀 옥양목 치마저고리, 그리고 흰고무신을 신은 중년의 여인이 내 앞을 스쳐간다. 어느시절의 옥양목인가? 문득 나는, 내가 흰빛을 유난히 좋아한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것은 생각하는 빛이다. 봄철을 연분홍 색깔이라면 여름은 물빛 고운 청록색이거나 붉은색일 터이고 가을은 노랭색일까? 담갈색일까? 이렇게 따져보면 겨울철은 별 수 없는 흰빛이다. 백설이 펑펑 쏟아져 내리는날, 창가에 앉아본 사람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젊은날의 철없던 실수와 고뇌들이 어떻게 그 맑은 명상속에서 새로운 미를 지니고 의식속으로 침전되어 가는지를.
그것은 노인의 빛이다. 연분홍색 아련한 어린이 시절부터 담청색의 사춘기, 그리고 붉은빛 정열의 청춘을 지나, 탐욕과 경쟁의 황색연령을 거쳐, 다분히 안정을 얻는 담갈색의 장년기를 넘어서면 드디어 흰빛으로 눈부신 노년에 이른다. 공자님은 이것을 마음내키는대로 해도 법도에 어그러지는 일이 없다고 했다. 흰빛은 실수가 없다.
북극 하늘에 찬란하게 펼쳐진다는 오로라가 아무리 아름답기로 내 마음이 찾아가는 이 흰빛만은 못할것이다. 그것은 인간의감정이 극한에 달하여 경악하는 순간, 얼굴에도 나타나는 빛이다.
그것은 놀라움 가운데서도 가장 놀라운 진실이 우리의 모든 감정을 통채로 사로잡았을때의 빛이다. 차라리 고통의 빛이요, 괴로움의 빛이다. 그라니 진실을 괴로움과 가깝게 있지 즐거움과 가깝지는 않다. 괴로움 가운데서 질병만큼 우리 인간에게 보편적인 것이 또 있을까?
그리하여 병원은 흰빛으로 장식된다. 의사도 간호원도 그래서 흰옷을 입는것일게다. 흰빛은 죽음 바로 앞에있는 빛이다. 죽음 앞에서는 지나온 생애가 아름다웠거나 부끄러웠거나 그것은 도무지 잊어버려야 할 티끌. 지나온 생애가 찬란했으면 찬란한 그만큼 더욱 더없고 저주받을 인생이었대도 어차피 거품같이 잊어버려야 할 뜬 구름. 그래서 죽음 앞에서 누구나 하얀마음이 된다.
그것은 모든것에 초연하여 기다리는 빛이다. 분노와 저주와 흥분으로 얼룩진 전쟁도 흰 깃발 하나로 종결이 되고 산천에 낭자하던 선혈이 말끔히 가시어진다.
흰빛은 화해의 빛깔이요 이해하는 빛깔이다. 아무도 흰 빛깔, 고운 바탕에는 섣불리 채색을 입히지 못한다.
그릇도 옥양목 치마저고리같은 그릇이라야 제대로 된 그릇이다. 적갈색의 진흙으로부터 그릇을 만들어내기 시작한 인류의 문명은 그 그릇들의 빛깔을 어떻게 변모시켜 왔는가?
잿빛의 토기 둔중한듯 날카로운 청동기 그러다가 다시 흙으로부터 뽑아낸 저 비취옥빛 푸른청자 그러나 그 다음 우리 조상은 푸른듯 희고 다시누른듯 흰 빛깔의 백자를 만들어냈다. 모든 빛깔을 두루 편력하고 난 다음에 마지막으로 돌아온 가장 완전한 색깔, 그것이 조선왕조의 백자임을 아는 사람은 모두 안다.
그러보니 우리 민족이 흰옷을 좋아한다는 사실도 범연한 것은 아니다. 백설같이 고결하겠다는 지극히 조촐한 염원으로 흰옷을 입었을것이다. 격정을 식히고 명상하는 심정으로 임종을 앞둔 환자의 기다림같은 자세로 사랑과 이해의 손길을 뻗기전에 그 마음을 옷빛으로 표상한 것이었을게다.
나는 멀어져가는 여인의 뒷모습을 본다. 한번쯤 힐끗 돌아서주지 않을까? 그러면 그의 웃음이 꼭 하얀 국화꽃 향기를 닮았는지 확인해볼 터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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