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 64년간이나 사귄 친구 지원은 당신 영전에 머리를 숙이고 서있습니다. 당신은 나이로는 네 살 위인 형이었고 동문으로는 선배였고 학식으로는 스승이었으며 우정으로는 지기였나이다.
신부님은 80을 넘긴 인생공도를 마치고 가셨으니 크게 애통하고 슬픈 일은 없사오나 우리 한국 교회사의 혜성이던 존재가 그 빛을 감추고 후진사학도들의 든든한 지팡이가 동강나고 말았으니 어찌 아쉽고 애달프지 않으리까!
당신은 우리 순교사와 인연이 깊은 거제도(巨濟島)에서 태어나서 복자 김대건 신부의 신학생때와 같은 나이로 용산 신학교에 입학할때는 공부도 잘 못한 섬아이였었지요. 그러나 초중등과부터 남다른 재주와 총기때문에 무리중에 뛰어난 수재(秀才)였었고 철학신학과에서는 어깨를 겨눌 사람이 없이 대구 성유스띠노 신학교의 제1회 졸업생이자 첫 사제로 신생 대구교구와 유스띠노신학교의 서막을 장식했지요?
그때부터 57년간이란 성직생활은 신앙에 독실함은 물론 열심이 불꽃같았고 신자들에 귀감이었고 포교선상에서는 충실한 일꾼이었고 신학교 교수로는 박학유능한 스승이었지요? 또한 일제 말년에 우리 한국 천주교의 첫 자치교구인 전주교구장직에다가 광주교구장까지 겸임하셔서 놈들의 최후 발악의 탄압과 고초를 견디기에 얼마나 벅찼었나이까? 해방을 맞아 모교구인 대구 제4대교구장으로 영전하심은 당신의 평소 높은 학덕의 소치였으이라.
그러나 해방 후 혼란한 사회상과 들뜬 젊은이들의 세대차에 밀려 직(職)을 사양하고 자리를 뜨게된 비극은 신부님 일생의 아물 수 없는 상처였지요.
강원도 깊은 두메산골「물구비」란 한촌(寒村)에서 옛날 정치적 모량중상에 몰려 위리안치(圍리安置=가시넝쿨의 울타리속에 갇힘)의 귀양살이와 같은 서글픈 생애를 영위하게 되었음이 운명하기까지 악몽같은 추억이었을 것입니다.
이 못난 아우는「물구비」를 찾아 형의 그 삶을 목격하였고 함께 눈물을 지으며 실감하였나이다. 그때 신부님은 내게 무엇을 간곡히 부탁한것이 있었지요?
『김군 우리는 한국 교회사를 연구하면서 남은 세상을 보내세』
하고 내 손을 꽉 쥐면서 굳은 약속을 표하시던 그것말입니다. 형과 이 아우는 그 약속을 지키려고 애도쓰고 노력도 하였지요. 그 후부터 우리는 자주 만나 앞으로의 할 일을 구상하였지요. 그래서 신부님이 제일 먼저 내신 책이「선유의 천주사상과 제사문제(先儒의天主思想과祭祠問題)이었는데 학계에서는 감탄의 선풍을 일으켰고 외교인 선비들에게 전교의 지침이 되어 불후의 명작이란 이름을 남겼지요. 당신이 춘천 영원한 도움의 성모수녀원 지도신부로 재직했을때 이 아우는 변변찮은 원고 보따리를 들고 얼마나 또 몇 번이나 귀찮게 하였던지요!「피묻은 쌍백합」「성웅 김대건전」「영남 순교사 및 발전사」를 교열해 주시느라고 말입니다.
신부님은 너무 저를 사랑해주셨습니다. 우스운 이야기입니다마는 댁에서 빚은 명주(銘酒), 다른 사람에게는 맛도 잘 보이지 않는것을 틈틈이 한잔씩 나누면서 옛 추억을 씹던 그 흥취와 우정미는 본인들 아니고는 모를것입니다. 달 밝은 정원 한 모퉁이에서 여름밤이 깊도록 교열하시는 원고를 가지고 예리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었고 원고중에 조금 의심이 가는 대목에 와서는 한참 눈을 감고 생각하시다가 이마를 탁 치면서 캐캐묵어빠진 헌 노트 뭉치속에서 휴지같은 종이 나부랑이를 찾아내어 옛 신학교 재직시에 메모해두었던 기록을 들추면서 역사의 생명인 인명 연월일 장소 사건의 전말 등을 빈틈없이 찾아내어 고칠것, 바꿀것, 보충할것 등을 지시하던 그 진지하고도 총명한 모습을 볼 적마다 나는 몇 번이고 감탄해마지 않았답니다.
1969년 겨울이었지요. 내가 춘천을 갔더니 신부님은 무슨 원고를 쓰고 계셨습니다. 알고보니「한국 가톨릭사의 웅위」란 책을 꾸미는 중이었지요. 한 달을 붙잡혀 묵으면서 편집의 조역을 해드렸는데 우리 한국 신앙의 비조(鼻祖) 베드로 이승훈의 천추에 씻지못할 세 번 배교자의 누명을 교회내의 사료에서보다 당시 천주교와 이승훈 정약용님들의 원수이고 악당들이던 벽파선비들의 유록(遺錄)들에서 자료를 찾아 논거비판 (論據批判)하여 깨끗하게 벗기고 혁혁하고도 장렬한 순교사실을 입증한 것은 신부님 생전에 남긴 공적중에 금자탑이라는 정평이 자자합니다.
그 책은 이름 글자 그대로 한국 가톨릭사의 웅위요 수호요 나침판이었나이다. 기간 간행물 중 우리 교회사에 대한 그릇된 점 외곡된건 미비한데를 일일이 지적하여 만일 교회사를 해치는 병이라면 편작의 화제(和制)였고 비뚤고 굽어졌으면 정골정형(整骨形)의 묘기였나이다.
신부님이 와병인사절(臥病人事絶)할 재작년 가을이었나 봅니다.
몸과 손은 말을 잘 듣지않고 귀는 철벽에다 아물아물하고 정신은 왔다갔다 하는데 원고를 쓰신것이「배론 성지」초고였지요. 그러나 그 원고를 마치는둥 마는둥 원주 지주교님이 그만 가지고 갔다고 몇 번이나 편지로『내가 병 중에 쓴 것이라 어떻게 되었는지 잘 모르겠는데 김군이 정리를 해주었으면 내가 안심하고 눈을 감겠다』고 하셨지요. 저는 신부님의 필생의 작품이요 우리 교회사의 비중높은 부분이었기에 당신의 뜻을 이어 원주로 기별하여 그 원고를 가져다가 힘대로 정리해드렸지요. 그 책이 햇빛을 보게된 후에 당신이 읽어볼 정신은 이미 병마에게 사로잡히고 말았을 때인지라 읽어보지 못한 한을 품은 그대로 가셨으나 염려는 놓으시오. 사학가로서 할 일 하셨으니 편안히 잠드소서.
『망자 편안함에 쉬어지이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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