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령 읍내를 떠나올 때는 꼭 첩보영화의 한 장면을 연상케 했다. 저녁상을 외면한게 아깝다고 생각할 겨를도 없이 본당신부님과 함께 출발 2분전인 답곡행 버스를 갈아타기 위해서 허겁지겁 터미널로 달렸다.
나환후 정착촌을 대학 1학년 때 우연히 찾게 되어 이번이 세 번째가 되는 셈이다. 그곳 마을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하고 있을까? 얼마 후에 전개될 생소한 얼굴들과의 만남의 마음 졸이게 했다.
답곡동 약국 앞이라고 고함치는 기사 아저씨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일어서는데 빨간 스웨터를 입은 사람이 올라서면서『학사님이세요ㆍ그러시면 그냥 계세요』라고 하면서 이내 빈자리에 털썩 주저않아 아무 말이 없다. 오늘은 종일토록 첩보극에 가담해 버린 것 같다.
몇 구비를 더 돌아 작은 불빛이 보이는 산동네에 닿았다. 곧이어 그들 앞에 죄인처럼 끌려나가 서로의 첫대면이 시작되면서, 심하게신체를 상해 일그러진 얼굴들을보자 서글픈 하소연을 듣는 것 같았다. 그럼에도 꼬마들은 함께 놀 수 있는 친구를 하나 얻었다는 기쁨에 신이 나 있었다.
소음 공해가 없어 오랜만에 거의 완벽한 적막을 맛본다. 엊저녁 연탄가스걱정으로 약속된 내일을 의심했던 부끄러운 아침이 밝았다. 조반을 마치고 아 마을에서 할아버지로 곧잘 통하는 정삼영(아우구스띠노)씨를 만나 마을 정황을 자세히 듣게 되었다.
은양마을이 설립되던 그 어렵던 해의 무용담이며, 양돈사업의 실패로 빚더미에 눌려 도대체 풀어낼 재간이 없다는 이야기들을 깨알같이 쏟아놓으셨다. 지난해도 야산 몇 평을 일구어 축사를 짓겠다던 게 빚으로 남아 큰아들 도움으로 겨우 반쪽만 갚았다며 한숨을 지으신다.
막내 데레사가 돈을 꾸어올 때 오라버니가 등 뒤에서 울더라는 이야기를 할 때는 모두 목놓아 울고 싶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주민들 스스로가 일어설 수 있는 기반이 없다는 것이 난제다. 반반한 토지도 없고 그렇다고 한번 허리를 잘라버린 듯한 양돈사업도 밀려있는 사료값에 엄두도 못낼 형편이란다.
여름이면 이들은 들로 산으로 뱀을 잡으러 나선다. 남아있는 건강한 식구를 살려보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지난 여름엔 시몬 아저씨의 막내동이가 독사에 물려 급사했었다.
어제는 마을에 있는 유일한 경운기에다 꼬마 친구들을 모두 태우고 낙동강모래밭에 나들이를 갔다. 돌아오는 길에 사로잡아온 오리 한 마리가 죽어버렸다. 친구들은 슬픈 이별의 긴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아마도 그들의 머릿속에는 작년에 독사에게 물려 하늘나라로 간 그들의 친구를 함께 기억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곳에서 가난한 그들을 통하여 사랑도 신앙도 관념이 아니라 실천임을 배웠다. 교우 형제자매님들의 사랑을 기다리는 곳이었고 거리에는 가난한 예수형제가 살고 계신다.
낙동강 모래톱에는 내일의 끼니를 잊어버린 철새 떼들이 해거름의 하늘에 긴그림을 그린다.
이 마지아<경북 경산군 하양읍 동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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