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룻밤 자고 나면 달라지는 세상에서 팔십 평생을 외곬으로 살아온 분을 뵈오면 우선 그 신념에 찬 삶에 대하여 찬사를 아니 드릴 수 없다.
작년 여름방학에 나는 한 문 몇 줄을 읽으려고 경상남도 산청(山淸)에 사시는 노유(老儒) 중재 김황(重庸金) 선생을 찾아 뵈었었다. 비록 모시옷이기는 할 망정 삼복중에도 두루마기를 벗지않고 하루종일 앉아계셨다. 운동이라고는 아침 저녁으로 서당을 한바퀴 도시는 것이 고작이었다. 해가 설핏해야 두루마기를 벗으시고 동저고리 바람에 부채질을 하셨다. 서고(書庫)가 있는 마루방을 사이에 두고 선생님방과 우리들의 공부방이 마주보고 있었는데 여러 사람이 목청을 높여 글을 읽어도 누가 토를 잘못 붙이고 소리의 장단이 틀리는지 기억하셨다가 식사시간같은 때에 자연스럽게 지적하며 고쳐 주셨다.
하루는 몸이 불편하시다기에 누우신 채로 말씀을 하시라고 여쭈었더니『성현의 말씀을 누워서 얘기해?』하시면서 굳이 일어나 앉으셔서 강의를 하시는데 눈을 감으시고도 글자 한 자 빠짐이 없으셨다. 원문(原文)과 대주(大註)는 말할것도 없고 깨알같이 박혀있는 세주(細註)까지도 한글자도 틀림이 없이 시냇물이 흐르듯 좔좔따로 외우셨다.
어느 부분이 미심하여 다시 여쭈어보면 꼭 같은 말씀을 그대로 반복하여 외우신 다음에야 비근한 예를 들어 알기 쉽게 풀이를 하셨다. 한평생 이사 한 번 해 본 일이 없는 같은 마을, 같은 집 같은 서재안에서 신 학문의 물결이 그렇게 밀려들어도 옛 모습 그대로 살아오시는 중재 선생님, 우리가 물건을 너무 헤프게 쓴다고 꾸짖으시는 선생님은 시한수를 지으셔도 꼭 담배갑 안쪽같은데에 초를 잡으셨다가 다시 큰 종이에 옮겨 쓰시었다.
날이 어두워 모기향을 피워놓고 지나온 세월의 회고담을 듣는것은 글 배우는 것 못지않은 즐거움이었다.
『일제치하에서 지조를 잃지않고 살아온 사람이 많이 있지만 공부한 학자로 위당(爲堂) 정인보(鄭寅普) 선생만한 분이 또 있을까?』이렇게 선생님이 말씀을 꺼내니까 그날 저녁은 그만 위당인물론이 되고 말았다.
반일운동에 앞장을 섰던 어느 사학자가 조선총독부에 협조하는 기미를 보이자 친구의 훼절에 통분을 이기지 못한 위당 선생은 그 친구의 집으로 찾아가 대문앞에 거적을 깔고 옛날의 내 친구는 죽어 없어졌다고 하며 조상(吊表)하는 곡(哭)을 하셨다는 위당이니만큼 그가 남긴 일화들은 무척 괴팍하고 별스러웠을 것이다. 그날은 다음 같은 얘기로 위당론의 마지막 꽃을 피웠다.
초라한 행색의 갓을 쓴 시골 노인 한 분이 남대문통을 지나가고 있었다. 마침 이른 봄이라 얼었던 땅이 막 풀리기 시작하여 길을 걷기에 불편할정도로 질척이었다. 노인의 맞은 편에는 말쑥하게 차린 신자 한 분이 걸어오다가 그 시골 노인을 바라보더니 반색을 하면서 인사를 드린다.
『아니, 선생님 아니십니까?』
놀라운 사실은 그 다음에 벌어졌다. 신사는 노인이 서 계신 앞자리, 그 질척이는 땅바닥에 무릎을 꿇어 공손히 큰 절을 올리는 것이 아닌가? 그신자는 바로 위당 선생이시었다.
이 진풍경 한 토막은 우리나라 선비들의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며 수십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스승을 모시는 한 제자의 충직한 몸가짐의 표본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내가 산청을 떠나올때 대문밖까지 배웅을 나오신 선생님께 그 골목길에서 위당처럼 큰 절을 했음은 두말할 필요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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