촌수로는 멀지만 나에겐 아저씨 뻘이 되는 올해 갓 일흔의 친척 어른이 한 분 계신다. 젊어 한 때는 세상이 쩌렁쩌렁 울리도록 잘사셨다. 요즘 규모로 보면 별 것이 아닐지 모르지만 종로 한복판에 이층집이 두채나 있었고 이것저것 손대는 사업이 많아서 우리 친척들이 모이기만 하면『아무개 아저씨는 직업이 열 가지는 될 거야. 명함을 찍으면 이름 쓸 자리가 없겠지?』하면서 부러워들 하였다.
그러나 가끔 부인되시는 아주머님을 울리는 것이 그 아저씨의 큰 흠이었다. 심심치 않게 첩치가를 하여 살림을 차리고 한 달이고 두 달이고 집에는 그림자도 비치지 않으셨다. 그러면 그 아주머님은 울며 불며 집안 친척집으로 찾아 다니면서 해결책을 묻는 것이었다. 그렇게 여자관계가 복잡하고 보니까 여기 저기서 태어난 아이들이 여럿 있어서 결국은 아주머니를 생모로 하여 호적에 올리고 보니 나이 사십이 된 부인 앞으로 매년 한 명씩 출생신고를 해야 되는 기현상이 생기기도 했었다. 그러면서도 사업은 변함이 없었다. 게다가 본집 소생의 자녀들도 모두 출중한 편이어서 현재 나와 동갑인 그 집 둘째 아들은 미국에서 의사로 잘 살고 있고 그 밑의 자녀도 둘이나 미국에 유학하고 있을 정도로 다복했다.
이렇듯 복많으신 아저씨에게 몇 해 전에 청천벽력이 떨어지고 말았다. 고혈압으로 쓰러지시고만 것이었다. 돌아가시는 줄 알았으나 급히 손을 써서 목숨은 건졌는데 불행하게도 중풍이 드셔서 오른쪽 수족을 쓰시지 못하게 되였다. 성품이 원래 호탕하고 팔팔하시던 분이라 처음에는 사람만 보면 눈물을 흘리시더니 한번은 수면제를 한꺼번에 여러 알을 구해 잡수시고 사흘간이나 혼수상태에 빠지는 자살소동을 피우시기도 하였다. 그러는 동안 그 많던 재산의 상당량이 없어졌지만 그것보다도 가장 서글픈 사실은 그 아저씨가 완전히 스스로 폐인행세를 하고 비감하고 비굴해하시는 일이었다.
그러던 아저씨의 생신이 엊그제 있었다. 나는 몹시 불안한 심정으로 아저씨를 뵈오러 갔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대문을 들어서니 그 아저씨의 호방한 웃음이 온 집안에 가득퍼진다.
『어! 심 교수 오랜만이야. 그래 그동안 왜 한번도 안 들려?』
그 웃음, 그 목소리는 이삼십년전 아주머니 속을 푹푹 썩히실 때의 그 웃음이요 그 목소리였다. 어떻게 위로의 말씀을 드릴까 걱정하던 나는 의외의 상황에 당황하면서도 우선 마음이 흔쾌하여지는 것은 숨길 수 없었다.
『요즘은 건강이 어떠십니까?』『응! 많이 좋아졌어! 내가 매일 오릿길 이상 산보할꺼야. 1킬로쯤 떨어진 약수터를 매일 새벽 단장 짚고 걸어갔다 오니까…』
그러시면서 드믄드믄 들려주시는 말씀은 당신의 사업이 다시 많아졌다는 것이었다. 난초 가꾸기 마당 쓸기 노인청의 회장 일 등 이것저것 손꼽는 것이 여러 개가 되었다.
그러나 손가락을 접었다 펴시며 헤아리는 사업보다도 내 손목을 꽉 잡으시며 들려주신 마지막 말씀속에서 이 아저씨가 어떻게 다시 기운을 얻으셨는지를 나는 깨닫게 되었다.
『내가 벌을 받는 거야. 지옥이 따로 있나? 이승에서 다 갚고 가야 돼. 기왕에 벌을 받을 바엔 즐거운 마음으로 받아야 하지 않겠어? 허허』
왼손으론 연신 내 어깨를 두드리며 아저씨는 나에게 술을 권하셨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