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시골집 뒷뜰에 해묵은 감나무 몇 그루가 있었다. 수령(樹齡) 이 할머님 연세만큼이나 오래되었던지 나무 한쪽이 찌그러진 채 볼품은 없었어도 감만은 가지가 휘도록 푸짐하게 열렸었다.
초가을부터 채 익지도 않은 떫은 풋감을 진 장대로 두들겨 따먹고 뒤가 막혀 고생하던 기억이 난다.
늦가을엔 어른들이 몇 바지락씩의 감을 다 때내고 나무마다 한 두알의 「까치밥」을 남겨놓는걸 보았다. 이런 감일수록 크고 살쪄서 유난히 먹음직스러워 보이는 것이었다. 장대를 두 세개 이어서 기를 쓰고 따먹으려다 호되게 야단을 맞았다.
『까치 밥을 건드리면 x알 떨어진다』시던 할머니 말씀이 맘에 켕겨서 감나무 근처에 갈 때면 두 손으로 밑을 싸쥐곤 했다.
이제 생각컨데 마지막 잎새와 함께 앙상한 나뭇가지에 남겨진 마지막 까치밥 한 알-. 그것은 곧 늙은 감나무의 한 해의 노역(勞役) 이 응결된, 정혼(精魂) 이자 x알격인 심벌로서 이것만은 끝내고히 지켜주려던 우리 할머님네들의 감나무에 향한 순후(順厚)한 최후 선심이자 애틋한 희생 (回生) 에의 기원(祈願) 이 아니었던가 싶다.
수은주가 영하 11도로 내려갔다.
최전방에서의 첫 눈 소식도 들린다.
코트깃을 고추 세우고 성탄을 앞둔 서울 거리를 걸으며 문득「투루게네프와 거지이야기」를 떠올린다. 흔히 알려진 이야기지만 차가운 겨울 오후 산보 길에서 불쑥 손을 내미는 거지에게 마침 무일푼이었던 투루네프는 가벼운 당혹을 느끼며 『여보게 이 친구 오늘은 내 유감스럽게도 빈손인데 어찌나.…
헌데 자네 손이 꽁꽁 얼었군 그래. 자 우리 악수라도 한번 나눔세』한동안 투루게네프의 가냘픈 손을 멍청히 바라보던 거지가 이윽고 그의 진정을 알아차렸던지 몸을 벌떡 일으키며 『선생님, 오늘은 정말 제 일생일대에 가장 기쁜 날입니다. 저 같은 놈도 사람으로 대접해주시니….』 하며 감격해 했다는 내용이다. 불우이웃 돕기니 자선남비니 하는 것이 이맘때면 으레히 연례행사처럼 등장하나 정녕 영하의 기온마냥 형식과 위선으로 얼어붙은 너와 나의 심정을 포근히 녹여줄 투루게네프의 저 훈훈한 한가닥 참된 인정- 그것은 참으로 우리가 끝내 보존해야 할 한 알의 「까치밥」격인 「최후의 가치」가 아닐까 생각해본다
가톨릭 칼렌다를 들쳐보면, 대림절이 시작되기 직전인 그리스도왕 축일이 연중 맨 마지막 주일에 해당한다. 이날의 복음도 마침 「최후의 심판」광경을 단적으로 묘사해 주고 있다.
「너희가 이 가장 미소한 형제 중 하나에게 해주지 않은 것이 곧 내게 해주지 않은 것이다」(마태25ㆍ45)
엄위로운 판관의 자격으로 우리 영원을 결정할 마지막 기준을, 다름아닌 이들 의지할 곳 없고 소외 당한채, 억압받고 가난하며 병들고 무지하여 고민하는 불우한 형제들을 어떤 마음으로 어떻게 대접했는냐에 두겠다는 단호한 말씀이다.
실로 이 귀절에서 우리는 바로 그리스도교 계시의 중심이자 우리 신앙생활의 핵심을 밝혀주는 신비를 보는 것이다.
아니 우리가 타고난 이기심이란 독소를 최후의 한 방울까지라고 말끔히 씻어내기 위한 마지막이자 최고 단위의 항생제를 투약(投藥)받은 셈이다.
「마지막」에 남겨진 「한 알이 까치밥」이 주는 교훈이 스산한 세모와 함께 유달리 무겁고 깊게 우리 가슴에 와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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