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저고리 바람에 밑둥 터진 바지를 입고 훌쩍이며 이웃동네 「성교당」 (聖敎堂) 밑글방에서 읽던 천자문이 내 책쟁이 생활의 효시라 할까? 뜻도 모르면서 날마다 몸을 앞뒤로 흔들며 목청껏 뽑아대는 글읽기가 천자문을 넘어 사자소학, 동몽선습, 명심보감 통감...등을 차례로 뗄적마다 이른바「책거리」라 해서 한 상씩 걸판지게 차려먹곤 했다.
주일학교 시절엔 1년에 두 차례씩 춘추판공때 열리는 교리경시에서 교리문답의 각 편과 「소일과절요」의 각 경문내용을 눈 감고 내리 외우는 시합을 하는데 소년부 1등은 항상 독차지하다시피 해서, 이때 상품으로 타다놓은 상본이며 성물들이 지금도 해묵은 경본책 갈피나 다락속에서 발견되곤 한다.
학교 들어가서도 동무들과 어울려 놀기보다는 골방에 틀어 박혀서 읽을만한 책이면 닥치는 대로 줏어읽는게 취미였다. 심지어 밥먹을 때도 재미있는 책이면 손에서 놓지를 않고 읽곤 하다가 꾸중도 여러 번 들었다. 어떤때는 어머님이 책 때문에 내 몸이 야윈다고 해서 나 몰래 책을 감추어 놓기까지 하셨다.
이건 좀 뭐한 이야기지만 이 무렵 책읽는데 아무런 간섭도 안받고 또 가장 정신집중이 잘되는 곳은 칙간(칙間) 이었다. 지금도 이「칙간에서의 독서삼매경에 빠지는 취향」만은 그대로 남아서 화장실에 갈때면 으레, 책이나 신문 담배 성냥 휴지 등 완전무장을 갖추고 장기체재하는 통에 급한 용무의 딴 사람들을 곤란하게 하는 때가 많다.
고교시절과 대학생때도 과외활동으로 교우지를 편집합네 웅변을 합네 하고 원고뭉치나 책보따리를 짊어지고 다니며 꽤나 설쳤다.
장교 후보생으로 들어가 그 고된 훈련을 치루면서도「성좌」지의 창간을 서둘러 임관기념호를 냈는데 지금도 이 기관지가 후배들의 손으로 제명 그대로 계속되어 나온다니 흐뭇한 일이다.
제대하고서도 배운 도둑직이라고 손쉽게 구한 직장이 잡지사였고, 이래 출판ㆍ편집ㆍ독서운동 부문에서 심부름 하며 밥을 얻어먹기 1405년-.이제 꼼짝없이 책쟁이로서 틀이 잡혀져 버린 셈이다.
어떻게 보면「외길인생」이랄수도 있겠는데 이제 불혹을 갓넘은 이 시점에서 책을 가까이 하고, 책을 엮으며 걸어온 내 인생에 별로 후회는 없다. 지금도 내 빈약한 서가에는 누구네처럼 장식용 장서본이 아닌, 한 권 한 권마다 내 젊음의 정열을 영소시키며 꾸며낸 헌책들로 채워져 있어, 마주할때마다 못생겼어도 귀여운 내 아이를 보는듯 정겹다.
들리는 말로 가톨릭계 출판도 오랜 침체를 벗고 근래 꽤 활기를 띈다고 한다. 반가운 일이다. 4개 출판사가 저마다 특색있는 기획과 보급활동을벌이고 있음이 눈에 두드러진다. 헌데 여기 간과해서는 안될 주요한 문제가 있음을 굳이 지적하고 싶다. 그것은 가톨릭 출판의 궁극목표가 한낱 보급의 다량화로 그쳐서는 안되겠다는 점이다. 가톨릭 성서마저도 장식용 책장에서 낮잠을 자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읽히고 새겨서 영혼의 풍성한 양식이 되겠끔 그 구체적인 기회와 방법을 제시해 주어야 한다는 말이다. 적어도 주일학교적부터 노인네에 이르기까지 일평생을 통해 연령과 학력의 계층에 따라 체계적이고도 조직화된 성서읽기 지도운동이 전개되어야 한다. 신자 재교육이란 막중한 임무의 효과적 수행을 위해서도 이 방법은 초교구적으로 진지하게 검토될 성질의 것으로 본다.
이른바 미국의「GREAT BOOKS PROGRAM」이나 우리나라의「고전읽기」운동 같은 교과적인 독서운동방법이 가톨릭에도 도입되었으면 하느것이다. 이 운동 도입을 위한 보다 상세한 구상은 후일 재론할 기회가 있겠거니와 책을 가까이하고 책을 읽으며 사는 한 외길인생의 집념과도 같은 넋두리를 이에 몇마디 늘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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