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월만 되면 괜히 우울해진다. 3ㆍ1운동과 우리 교회를 연결 지을만한 연결고리가 없는 것처럼 생각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3ㆍ1운동과 한국교회는 무관한 것 같은 생각 때문이다. 민족적으로 국가적으로 뚜렷히 떠오르는 항일운동, 그 감동의 줄거리를 교회와 연관 지을 수 없음은 어떤 이유인가.
대답은 간단하다. 우리 교회가 어둠에 갇힌 민족의 아픈 역사 속에 함께 살아있지 못한 것이 그 첫째 이유다.
다른 하나는 비록 교회의 공식적인 이름을 걸진 않았으되 잃어버린 나라, 빼앗긴 주권을 찾기 위한 숭고한 싸움에 한 사람의 신앙인으로 참여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잊고 있기 때문이기도 한다.
의사 안중근 토마. 1909년 만주 하얼삔역두에서 당시 조선침탈의 원흉, 이또 히로부미를 사살한 안중근 의사는 이 두 가지 숙제를 동시에 풀어주는 확고부동한 「열쇠」가 아닐 수 없다.
우리 민족의 항일운동사의 대표이자 선두주자격인 그를 모르는 사람은 별로 없지만 독실한 가톨릭신자로서 그를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한일국치 직전에 이루어진 그의 거사는 민족사적으로 볼 때 항일운동의「기폭제」로 평가받을 수 있다. 그의 거사는 풍전등화였던 대한제국의 운명을 국제 여론 앞에 끌어내게 했고 수많은 후배의사, 열사를 배출케 했다. 그의 거사는 빈약하기만 한 교회의「저항운동사」를 넉넉히 채워주는 동기를 부여하고 있다.
그러나 당시 교회는 조선 침탈의 우두머리 이또 히로부미를 제거한 안중근의 의거를 정당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의 애국심은 인정하면서도 신앙적인 견지에서는 그의 의거를「살인죄」로 단죄했다. 한걸음 더 나아가 교회는 그가「천주교 신자가 아닌 것처럼」행동했으며 그가「신자인 것이 빨리 잊혀지기를」바랐다.
교회의 이같은 처사는 안 의사에 대한「단죄」로 받아들어졌고 신앙인으로서의 안중근의 존재는 잊혀지고 묻혀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민족사에 굵은 획을 그었던 안 의사 사건은 교회 내에서 자연스럽게 소멸될 수밖에 없었다.
「안중근 사건」은 당시 조선교회 사목을 담당해온 프랑스 선교사들의 입장에서 비춰볼 필요가 있다. 본국의 노선을 프랑스 선교사들이 따라야 했음은 물론이려니와 그들은 한국교회의 민족적 과제를 충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이 분명하다.
모진 박해를 견디어야 했던 그들은 정치적인 급류에 휘말려 또 다른 박해 속으로 빠져들기를 두려워했는지도 모른다. 단순히 그리스도교적 윤리면에서 안 의사의 행위를 용납하기 힘들었으리라는 점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교회로부터「단죄」되었던 그의 의거가 새로운 시각에서 조명되기 시작한 것은 상당히 의미있는 사건이 아닐 수 없다. 79년, 그의 탄생「1백주기」를 맞아 봉헌된 기념미사는 무관심 속에 파묻혀 있던「신앙인 안중근」을 들추어내는 일로 시작된 것이다.
신앙인으로서의 안중근을 살펴보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일찍이 천주교에 입문한 부친 안태훈(까릴로)의 인도로 신앙인의 길로 들어선 안중근의 삶은 비록 짧았으나 행동하는 신앙인의 모범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목숨을 바칠 만큼 나라를 사랑하고 나라에 충성했던 안 의사는 그에 앞서 어둠 속의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하는 일을 우선으로 삼았다는 얘기다. 거사 후 신자임을 떳떳이 밝히는 그는 신앙인의 입장에서 자신의 의거가 전쟁의 일환으로 범법자를 응징한 것이며 전쟁 중의 정당방위는 가톨릭신앙에서도 정당화 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신앙인 안중근의 모습은 거사 후 체포돼 감옥에 있으면서도 이어지고 있다. 자기를 심문하는 일인이나 변호사에게 여러 번 하느님 나라를 설명하고 입교를 권고했던 사실들이 이를 설명해주고 있다. 사형이 확정된 후에도 안 의사는 신앙인으로 죽을 준비를 철저히 했다.
안 의사는 영세신부이자 영신지도신부였던 홍석구 신부(빌렘ㆍ프랑스 선교사)를 요청, 고백성사를 받고 영성체를 하는 등 신앙인으로서의 삶을 완벽히 마무리 하고자 한 것이다.
안중근 의사의 삶을 되짚어보는 것은 바로 이런 의미에서 필요하다 하겠다. 한국 민족사에 뚜렷한 획을 그었던 한 사람의 의인(義人)으로 안 의사를 추앙하는 우리가 자랑스럽고 떳떳한 신앙인으로 죽었던 그를 모른체 한다면 우스운 노릇이다.
안 의사의 족적을 살펴 드러내는 작업이 시급한 이유는 또 있다. 또 그의 행적이 한국 민족운동사에 굵은 획으로 남아있다면 한국 근대교회사 역시 그의 애국심, 그의 모든 것을 담고 있어야 마땅한 일이기 때문이다.
그의 애국심, 그의 신앙심이 분명한 역사적 사실이고 그 때문에 목숨까지 기꺼이 바친 외로운 사람이기 때문이다.
안중근의 의거를 빼놓고 가톨릭교회의 독립운동을 이야기하기는 어렵다. 교회사가 최석우 신부의 표현대로 그의 의거는 가톨릭 독립운동의 절정을 이루고 있으므로 안중근이 열었던 살신위국(殺身爲國)의 정신은 그의 종제(從弟) 안명근을 비롯, 이기당 등 수많은 청년 평신도들의 독립운동으로 전수되어 이어졌다.
따라서 안 의사 사건을 풀어나가는 것은 일제히 가톨릭교회의 저항운동사를 정립하는 첫 걸음이 되는 일이 된다.
외세의 침략을 저지하려던 민족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 교회가 보여준「부분적인 행동」들은 있는 그대로 객관적인 조명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것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간에.
민족의 거대한 함성이 들리는 듯한 3월, 가려진 신앙인 안중근을 한 번쯤 생각하는 것, 그것부터 우리가 시작해야 할 일인 것 같다.
李潤子 <취재국장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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