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에 와서 들은 이야기 중에는 평양에 가톨릭 측의 성당 하나와 개신교 측의 예배당 하나가 신축되었다는 사실이 있다.
어떠한 절차에 의하여 그렇게 되었는지는 잘 몰라도 반가운 소식이며 희망을 안겨주기도 한다.
무엇에 대한 희망인가? 여러 가지 중 하나는 북한의 인민도 하느님의 자녀로서 살 수 있을 것이라는데 대한 희망이다.
그런데 「복음선교」를 위한 남한 교회와 북한 공산주의간의 관계는 남북한 민족통일을 전제하지 않고서는 바람직하게 이루어지기 어려우,며 어떤 관계가 이루어진다 해도 많은 제약이 따를 것이라고 느껴진다. 그러나 민족통일은 정치ㆍ군사적으로 합의만 보면 이루어지리라고 기대하기 어렵다. 민족통일을 가능케 해주는 많은 요소들을 동시에 작용해야 하는데、이것은 사회현실의 변화를 의미한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들이 민족통일의 「당위성만을 논할 것」이 아니라 남북한의 「사회현실의 변화를 위하여 최선」을 다해야 할 것이다. 이 사회현실의 변화는 사회의 경제적․정치적․문화적 혁신과 동시에 사회 안에서 그 요소들이 영향을 받기도 하고 그 요소들에게 영향을 주기도 하는 인간의 변화를 의미하는 것이다.
왜 그런가? 한반도의 분단은 미소 강대국간의 경쟁의산물이며 국제정치 현실에 의하여 고착화되었을 뿐 아니라、남북한 정치 이데올로기의 대립에 의하여 이 고착 상태는 강화되었으며 이 대결은 처음부터 타협을 불가능하게 하면서 남북에서 독재체제로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통일이 미소강대국 없이 이루어지기 어려우며(이 문제는 취급하지 않음) 남북한의 사회현실적 변화없이 이루어지기 어려울 것이다.
이러한 정치 이데올로기의 영향권 내에서 실시해 온 남한 교회의 사목을 위해서도 남한 교회와 북한 공산주의간의 관계에 있어서 깊이 반성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교와 공산주의가 「절대로 공존할 수 없다」는 이유로 교회는 「무조건 멸공에 앞장」서야 한다고 주장한다면、이것은 건전한 「반공」이라기 보다는 멸공 이데올로기의 「종교의 적당화」가 될 우려가 크다고 보겠다. 여기에서 「반성」이라고 하면 잘못을 뉘우친다는 의미보다는 「비판적으로 생각해본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그러면 무엇에 대하여 반성하는가? 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사명 외에 다른 사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같은 사명을 교회의 수준이 아닌 개인적 또는 집단적 수준에서 이행하는데、경제적․정치적․문화적 조건하에서 구체적 활동을 통하여 하는 것이다.
「사목」(司牧)이 교회의 본질적 사명에서 나오는 인간구원의 봉사활동이라면、그리스도인은 교회의 이 「활동」이나 그 활동의 「형태」에 대하여 반성하는 것이다. 물론 사목자의 입장에서가 아니라 교회의 이 봉사활동에 구체적으로 그리고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입장에서 특히 그 활동의 타당성과 효과적 방법에 대하여 반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사회는 「주체사상」이 지배하는 곳이다 . 주체사상은 한마디로 말하여 『건설의 주인은 인민 대중이며 혁명과 건설을 주동하는 힘도 인민 대중에게 있다는 사상이다.
다시 말하면 자기 운명의 주인은 자기 자신이며 자기 운명을 개척하는 힘도 자기 자신에게 있다는 사상이다』라고 되어 있다. 이러한 혁명사상의 관점에서 볼때 종교는 무엇인가 『종교는 일종의 미신이다』
예수를 믿든지 불교를 믿든지 그것을 본질상 다 미신을 믿는 것이다. 「종교는 역사적으로 지배계급의 수중에 장악되어 인민을 기만하여 착취ㆍ억압하는 도구로 이용되어 왔으며、후진국가 인민들을 침략하는 사상적 도구로 이용되었다」고 설명되어 있다. 물론 주체사상이 모든 진리의 기준이 아니지만 일단 그 사상이 비판한 「종교형태」나 「교회형태」를 벗어나지 못한 종교나 교회는 북한사회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이 기회에 남한교회의 사목에 있어서 보완될 점이 다면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스도인의 적극적 사회참여 문제다.
(1) 하느님과 인간의 관계를 단순히 「상전과 종」의 관계와 동일시한다면 문제가 있다. 하느님 앞에 인간이 취할 수 있는 태도가 두 가지 밖에 없는데、하나는 하라는 대로 하는 것이고 다른 것은 반대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면 이 양자택일의 자유는 하느님 자녀의 「창의적 자유」와는 거리가 멀 것이며 결국 운명론에 봉착하게 될 것이다.
(2) 영혼과 육신을 구분하여 논하는 것은 타당하겠지만 온전한 분리시켜 「영혼의 선」으로 향하고 「육신은 악」으로 향한다고 보며 영혼을 구하려면 교만과 탐욕에 빠지게 하는 「육신적」이고 「현세적」관심을 버리고 오로지 「영신적」이고 「내세적」신심 속에서 살아야한다고 주장한다면、사회를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3) 계명을 지키는 것이 그렇게 중요하지만、그 준수의 유일한 목적은 하느님의 최후심판에 대비하여 「개인적 공적이나 쌓기 위한 것」이라든가 또는 「성사배경의 유일한 목적이 주님과의 개별적 만남」정도라고 생각한다면、인간은 비사회화 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렇다면 「사회건설」을 할 사람이 없을 것이며、「사회발전」은 필요가 없을 것이며、「사회변혁」은 오히려 하느님께 도전하는 교만이 될지도 모른다.
이렇게 다분히 「맹목적」 「내세적」 「개별적」경향은 그리스도인을 변질시킬 우려가 있음과 동시에 사회적 억압ㆍ착취에 결과적으로 유리한 조건을 제공하게 될 것이다.
그동안 수고해주신 정승현 신부님、박복주 수녀님、정용 교수님、안문기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이번 호로부터 방주의 창은 매월 필진이 바뀌는 방법으로 게재합니다. 이에 따라 3월 필자는 김춘호 신부입니다.
김춘호
<신부ㆍ서강대 종교학 교수>
◇1960년 사제서품
◇1979년 서독 마인쯔대학 신학박사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