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는 것이 힘이다」라는 말이 있지만 우리는 「아는 것이 병이다」라는 말을 흔히 듣기도 한다.
아는 것이 왜 병 일까하는 질문을 나는 요즘 가끔 자신에게 던져본다. 무엇을 알고. 어떻게 알며, 어떤 시각으로 앎의 대상을 바라보는가에 따라 앎에 대한 해석과 이해가 달라질 수 있고. 이렇게 상이한 이해방식들이 필경 실천과 관계있음은 자명한 일이다. 이론과 실천, 앎과 삶을 따로 떼어놓고 생각 할 수 없으니까 말이다. 최근 대학의 사태로 사회까지 떠들썩하게 되었고, 문자 그대로 한치를 내다보기 힘든 정국을 바라볼 때 이런 질문은 내게 거의 습성처럼 되어버렸다.
학교에서 혈기찬 젊은이들을 매일 대하고 강단에서 「진리」「정의」「자유」「사랑」과 같은 개념들을 설명해야 하는 것이 힘들게 느껴지는 것이 요즘의 솔직한 심경이다. 내 자신이 어눌하고, 지식과 실천의 한계를 절감하고 있는 터에 이 지면을 빌어 몇 마디 적으려하니 말 많은 세상에 더욱 말의 홍수로 범람하게 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되어 망설여지기도 한다. 어원에 따르면 「교수」는 진리를 「증거 하는 사람」(Professor)이다. 자신을 반성해 볼 때 이런 사명을 짊어진 사람이 허위를 증거(?)하고, 진실을 왜곡하거나 회피하고 그것을 알리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지 생각되기도 한다. 항간에서는 요즘 텔레비전에 자주 나가 사리에 맞지 않는 발언을 하는 교수가 「텔레비전용 교수」(Telefessor)라고 불린다는 얘기를 듣고 무언가 가슴이 찡함을 느꼈다. 교육현장에서 「교(敎)」(지식)만 강조되고 「육(育)」(인격도야)은 소홀히 하는 우리현실에서 보신철학을 견지하며 살아가야 할 것인지 생각할수록 고민이 눈덩이처럼 커져간다. 「지식기사」가 되어서는 안 되고 「지성인」이 되어야한다고 강단에서는 힘주어 말하면서 실제로는 자기모순을 범하고 있지나않은지 나는 참으로 자괴(自愧)의 느낌을 금하기 어렵다. 몇 년 안 되는 필자의 교직경험에서 말할 수 있는 것은 어느 시대에나 학생들은 순수하다는 것이다. 그 순수함으로 인하여 학생들은 이상과 현실의 틈바구니에서 때로는 방황하고 반항하기도 한다. 이것은 나이든 세대가 자신들의 지난 청년시기를 돌이켜보면 부정할 수 없는 것이다. 오늘날 국내의 언론매체는 청소년의 비행과 학원사태의 심각함을 보도 하고 있다. 이제는 이런 사태의 원인을 조사 분석하고 이에 대한 적극적인 대책이 세워져야할 때라고 본다. 물론 이런 과제는 근본적으로 가정에서부터 시작하여 학교와 사회교육이 떠맡아야 하는 것이다. 나이를 공짜로 먹지 않는다고 할 때, 필자를 포함하여 나이든 세대가 어떤 가치관을 지니고 살아왔으며 지금은 어떻게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깊이 반성해야할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일차적으로 위정자들의 책임이 가장 크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그들에게 책임전가 할 수 없다고 생각된다. 이점에서는 교회의 사정도 예외가 아니라고 생각된다. 본당의 청소년교육, 특히 가톨릭 학생들을 위한 사목이 얼마나 질적으로 심도 있게 이루어지고 있는가를 우리 모두 곰곰 생각해봐야 한다. 가톨릭 학생운동이 일반 학생운동과 내용적으로 구별되지 않으면서 전개된다면 이는 「하느님의 백성」인 신자모두의 책임이다. 얼마 전에 어떤 가톨릭 대학생과 얘기 나눌 기회가 있었다. 그는 사회문제에 큰 관심을 가지고 실천적인 해결방안을 모색하려는 학생이었다. 대화중에 놀란 것은 그 학생이 가톨릭 사회교리에 대한 지식은 없으면서 오히려 마르크시즘에 관계된 사상에 대해서는 상당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다. 물론 아는 것 자체를 우리가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다만 학생들이 마르크시즘을 무비판적으로 쉽게 원용 할 수 있다는 우려와 함께 내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다는 것을 통감한 것이다.
가끔 가지게 되는 경륜 있는 신부님들과 평신도와의 대화에서 내가 공감한 것은 이제라도 우리는 가톨릭사상을 적극적으로 청소년들에게 가르치고 가톨릭의사회교리를 보급하여 그들이 자신들의 생각을 걸러내고 참다운 그리스도교신자로서 성숙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청소년교육에 보다 큰 관심을 가지고 계획을 세워야하며 지원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런 교육을 통해 젊은이들은 「바른 앎」과 「잘못된 앎」을 식별할 수 있게 되고 제 3세기로 향하는 한국 가톨릭교회의 자랑스러운 역군이 될 것이다. 특별히 교회 안에서 나이든 세대는 젊은이들에게 긍지와 책임감을 함께 심어줘야 할 것이다. 이렇게 하지 않을 때 교회는 「늘 쇄신해 나아가는 교회」가 아니라 정체되고 낙후되어 시대의 사명을 기피하는 교회로 머물게 될 것이다. 누가 이것을 원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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