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사람은 자기 정당화(正當化)에 의해 살아가고 있다. 스스로 옳게 행동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심지어는 요사이 신문에 자주 물의를 일으키는 택시 강도들이나 다방에서 인질극을 벌이는 가련한 청년들까지도 자기 정당화가 확립되지 않고는 그러한 끔직한 행동을 저지르지 못할 것이다. 그러나 인간이 스스로 자기의 정당성을 주장하기 위해서는 언제나 자기 행동에 대한 변병이 필요하고 그 변명이 또한 납득할 만한 것일 때 더욱 자기 정당화는 힘이 있고 강력해진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기를 변호해 주는 사람은 많이 구하고자 하고 자기의 입장을 설득시키고자 하며 그래서 정치인들은 훌륭한 웅변으로 청중들에게 자기의 변명을 늘어 놓고 그것이 모든 사람에게 지지를 얻을 때 강력한 정치가가 탄생하게 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러한 자기 정당성은 자기 힘에 의한 것이 아니고 타인이나 객관적 사실이 자기를 입증해 주어야 정당해지는 수동적 정당화이다. 아무리 우리가 정당하다고 주장하더라도 우리들의 정당성은 이 수동적 정당성을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의 정당화가 수동적 정당화라는 것을 깨닫지 못할 때 또 그 수동적 정당화의 의미를 깨닫지 못할 때 우리 사회에는 어려움이 올 것이다. 성 토마스 아퀴나스에 의하면 모든 수동적 정당화는 언제나 정의를 향한 움직임이다. 열을 가하는 것은 열을 목적으로 하듯 외부로부터 여러 가지 정당성-타인의 의견이든 정당한 객관적 사실이든-을 끌어들여다가 한 사람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것은 언제나 정의 자체를 지향하는 것이어야 한다. 정의 자체를 지향하지 않는 수동적 정당성은 오래가지 못한다.
한편 정의는 그 본질상 비른 질서를 요구한다. 이러한 정의의 질서는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첫째는 그의 행동이 타인과 올바른 관계를 가져야 하고 사회의 공동선과도 올바른 질서를 가져야 한다. 달리 말하면 인간 행위는 타인과의 관계하에서만 공동선과의 관계하에서 규제를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둘째로 인간 자신의 내적 질서가 발라야(正) 한다. 그의 내적 자세가 더 높은 차원, 하느님의 질서에로 향해 있어야 하고 하느님의「의」에로 변화되어야 한다. 그러므로 자기가 정당하다고 하자면 위의 두 가지 조건-타인 및 공동선과의 관계와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이 이뤄져야 한다. 이렇다면 아무도 자기가 정당하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누가 감히 자기가 정당하다고 말하겠는가. 하느님께서 우리를 정당하다고 인정해 주지 않으면 자기가 정당하다고 할 수 없다.
우리 모두는 이러한 궁극적 수동성에 의해 움직이고 있음을 잊지 말아야겠다. 자기의 정당성을 스스로 합리화하고자 하는 사람들보다도 하느님에 의해 자기 정당성을 인정받는 사람이 많아지는 사회가 되었으면 한다.「하느님께서는 비록 죄인일지라도 올바른 사람으로 인정해 주실 수 있습니다」(로마서 4ㆍ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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