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즈음 보도들을 보면「대화」라는 말이 퍽 자주 나온다. 하지만 이름 없는 우리네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그 말이 어울릴 것 같지가 않다. 다만 교회 사정이 워낙 답답하니 대화할 것 없는 몇 마디 불평이나 해야겠다.
지난 성탄절을 기해서 지금 우리 교회에서는 특히 화해와 단결을 강조하고 있는 것 같다.
이 말은 물론 어제 오늘에 있던 얘기도 아니고 또 우리 교회 안에서만 있는 말도 아니다. 그리고 단결하자는 데야 異論이 있을 수 없다. 그러나 단결을 위해서는 꼭 한 가지 先決條件이 있으니 그것은 단결해야 할 사람들 사이에는 어떤 이유로도 적대감정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共同體의 유대가 合意로서 이루어져야 하고 合意가 이루어지려면 이해가 같아야 하며 이해가 相反되었으면 먼저 화해해야 한다. 그때 필요한 것이「대화」인 줄 안다. 그렇다면 대화란 對等한 조건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런 대화 조건은 執權層에서 마련해야 할 것이다.
예컨대 여기 열 명이서 한 集團을 이루기로 했다고 하자. 그런데 그 중 입곱이서 나머지 셋을 일곱을 위한 노예로 삼을 것을 결의했다 하자. 그러면 이 결의가 민주적 토의 원칙에는 어긋나지 않았을지 몰라도 이 集團에서 단결은 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이로 인한 分裂을 대화로서 해결코자 하면 먼저 묶인 것부터 풀어 주고 나서 화해를 청해야 한다. 만약 이것이 묶은 자 아닌 다른 사람의 개입으로 이루어지거나 묶인 자 스스로의 힘에 의하여 이루어진다면 그들 사이의 惡感情은 영원히 풀어질 수 없는 법이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의 지도자들은 이 원칙을 무시하고 무조건 화해하기만을 요구하는 느낌이다. 즉「다 함께 반성하자」는 말이 그것을 잘 나타내고 있지 않나 하는 것이다. 이 말은 대개 오늘의 교회가 침체한 데 대해 성직자나 평신도나 다 같이 반성하자는 뜻인 것 같다. 그러니까 서로 책임을 묻지 말고 화해하자는 것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전교가 안 되는 것이 교회가 대중들로부터 善으로 인정받지 못한 데 있고 냉담자와 외교인이 곧 교회에 대한 데모 군중인 셈이라 하더라도 평신도 특히 일반 평신도들에게는 어찌할 수 없는 입장이다. 즉 이들이 만약 교회 혁신 따위를 기원했다가는 꼭 파문되기 알맞을 뿐이다.
이렇게 묶여 있는 평신도와 사목적특권을 가지고 있는 성직자가 잘못된 책임을 함께 해야 한다면 불평등도 이만저만이 아닌 것이다. 이것은 마치 묶은 자가 풀어 주지는 않고 묶인 채로 증오심만 버리도록 요구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말하자면 묶는 과정에서 아프게 했을지도 모르니 그 점 묶은 자의 입장에서 반성하거니와 묶인 자도 그것쯤 묶였기로서니 증오하고 반항한 태도에 대해 깊이 반성하라는 셈이 된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