옛날 희랍 철학자 헤라클리토스는『만물은 유동(流動)하며 만물은 변한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그 종결(終結)에 도달할 수 있는 것은 없다』라고 하였다. 사실 현대 자연과학에 의하면 모든 물질은 끊임없이 그리고 일정한 운동을 하면서 내재적인 발전을 하는 생명에 따르고 있다.
우주는 창조되고 있지 창조돼 있는 것이 아니다. 만들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만들어지고 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변화에서 따라오는 커다란 위험과 불확실한 결과들 때문에 변화를 두려워하고 변화에 싫증을 내고 있다. 오늘의 생활이 내일에도 그대로 지속되기를 바라며 변화가 있더라도 자기의 현상태를 유지하고 강화시킬 수 있는 변화를 추구한다. 아무리 좋은 목적이 있다 하더라도 어려움이 수반되리라 싶은 그런 변화는 싫어한다. 럿셀이 말한 대로『변화는 과학적이요 진보는 윤리적이다. 변화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데 반해 진보는 논쟁의 대상이 된다』언제나 변화에는 적이 따른다. 마치 에집트를 탈출하여 신앙의 자유를 위한 여행 속에서도 에집트에 두고 온 고기 냄비가 그리워서 불평하는 사람들처럼 어느 시대이든 변화에 불만을 품고 불평을 말하는 사람이 있다.
그래도 지구는 돌고 있으며 시대는 변하고 있고 우리도 시대에 따라 변하고 있다. 특히 현대만큼 변화가 빠른 때는 없는 것 같다. 하나에 적응하기 전에 다른 것이 그 다음 것을 끌고 나오고 다음 다음 것이 멀리서 오고 있다. 교회는 이러한 변화 속에서 새로운 문제를 해결하고 새로운 기회에 대처해 가야 할 것이다. 너무나 교회는 변화에 무감각한 것이 아닌가.
우리는 변화를 두려워할 것이 없다.
변화란 현대 과학적 사유에서처럼 단순한 경험적 사물의 본질이 아니다. 즉 변화는 앞과 뒤의 단절이 아니라 한 종결에서 다른 종결로 가는 경로이다.
성 토마스의 말대로『동일(同一)한 무엇이 변화를 받으면 그 변화의 양극(兩極)은 서로 공통된다』변화되기 전의 것과 변화되기 시작한 후의 양극은 서로 동일한 것이다. 유리잔의 물을 변화시키기 위해 유리잔의 물을 쏟아버리고 포도주를 담는 것이 아니라 그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것이 변화이다. 최초의 것은 다른 것의 측면에 어떤 역할을 하고 제2의 것은 최초의 것을 수정하면서 연장한다. 변화의 양극 사이에는 본질적인 연결이 있다.
이렇게 변하는 것 중에 변치 않는 것이 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란 바로 이러한 변화의 생활이다. 아브라함이 그 거룩하고 변치 않는 말씀에 대한 믿음으로 끊임없이 갔듯이 또 사막을 여행하는 이스라엘 백성처럼 우리의 신앙생활 자체가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변화를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우리는 변화는 이 시대에 이 변화를 바른 방향으로 이끌어 갈 사명이 있다.
『변하면서 그 올바름을 잃지 않는 것이 귀한 것』이요 이것이 곧 변화의 윤리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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