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들의 분석에 의하면、6공출범 이후 권위주의적 형태가 어느 정도 청산되면서 사회 각계각층의 이익집단의 목소리가 커졌고 이데올로기의 개방화가 이루어졌다. 그런데 그동안 억압되어온 욕구가 한꺼번에 표출되기 시작하였고 이렇게 표출되는 욕구불만 중에는 너무「자기중심적」주장이、그 표현에 있어서는 너무「배타적」방법이 나타나고 있다. 많은 이들이 과격한 진압、폭력배투입、무조건 점거농성、쟁취 머리띠、타도 외침에는 걱정스러운 입장을 보이기도 한다. 어느 쪽을 막론하고 개개인의 이야기를 들으면 다 일리가 있다. 물론 인간이 인간답게 살기위하여 자기 권리를 주장한다는 그 자체에 반대할 수 있는 근거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내가 권리를 주장하면「자동적으로」상대편에게 이에 대한 의무가 부과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아직 당면하고 있는 문제중에는 5공비리-광주사건 해결문제(정부-국민간에、정부-시민간에)、노사분규문제(대기업에서 중소기업에까지、중공업에서 지하철을 거쳐 병원에까지)、대농정책문제(수세에서 고추파동까지)、학원소요 문제(학생-직원-교수간에、학생-정부간에)등이 남아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흔히들 생각하듯이 폭력만이 아니다. 폭력문제는 아직까지 논리적으로 해결된 일이 없는 것 같다. 그 이유는「폭력주의」나「비폭력주의」가 둘다 비현실적이기 때문이다. 강자는 항상 폭력을 사용해 왔는데 이에 대처한다는 비폭력주의는 몇몇 개별적 경우를 제외하고는 효과가 없어서 결과적으로 기존폭력을 묵인하는 일장이되어 버렸으며、강자의 폭력에는 무조건 폭력으로 대항할수밖에 없다는 폭력주의는 폭력문제를 해결하기는커녕 더 악화시켰다. 어쩌면 폭력에 대처하는 입장은 폭력 대 폭력만도 아니고 폭력의 포기만도 아니며「물리적」폭력의「초월」일지도 모른다.
물론 불의한 폭력에 대항할 최후수단으로서의 제한된 폭력사용 여부는 구체적 조건하에서 심사숙고할 대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폭력보다 더 근본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은「인간」자신이 아닌가 묻고 싶다.
우선 무엇이、이렇게 모든 욕구를 한꺼번에 표출하면서 과격하게 표현되도록 만들었다고 보는가? 많은 이들은 이 나라、이 사회의 제도에 문제가 있다고 보는 것 같다.
그뿐 아니라 이러한 문제들이 정책적으로 그리고 제도적으로 해결되기를 바라고 있는 것 같다. 하여간 뜯어고쳐야 한다는 결론이다. 물론 정책도、제도의개선도、구조의 변화도 필요하고 중요하지만、문제는 그것만으로 해결될 것이냐이다. 그것이「필요한 조건」임에는 틀림없지만「충분한 조건」은 되지 못한다고 본다.
새로운 시대는 무엇인가 변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무엇이 변하는가? 사회가 변하는 것이다. 또 무엇이 변해야 하는가? 인간 자신이다. 인간의 변화 없이 사회제도의 변화만으로 새 시대는 열리지 않을 것이다. 역사를 보면 우리의 종교、우리의 교회는 과거에 주로 인간의 변화를 강조하였다. 그리고『인간이 변하면 사회도 따라서 변하리라』고 믿어 왔었다. 그런데 무엇인가 그렇지 않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사회에 아무런「영향」을 주지 못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회「구조」의 변화를 가져오지 못한다는 뜻이다. 이 사실은 그 후 많은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특히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있어서…. 그래서 이들은 반대방향을 택하였다. 사회의 변화、즉 사회구조의 변화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리고『사회구조가 변하면 인간도 따라서 변하리라』고 믿어왔다. 그런데 역시 무엇인가 그렇지 않다는 사실이 확인되었다.
이것은 역사의 체험이 우리에게 가르쳐 준 사실이다.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는 분명히 교훈이 되는 것이다. 그리스도교의 설교ㆍ피정만으로 이룩하지 못한 것이 사회구조의 변화이며、사회주의 혁명 만으로 이룩하지 못한 것이 인간의 변화이다. 이 사회에도 언제부터인가 새 시대를 기다리는 영향이 일어났고 아직도 커가고 있다. 그런데 이 열망이 그 목적을 달성하려면「균형」을 유지해야 할 것 같다. 무슨 균형을 의미하는가? 사회구조의 변화와 인간의 변화간의 규형이다. 우리는 지금 진통을 겪고 있다. 새 시대가 태어나는 진통이라고 생각한다. 정치적 민주화의 진통이며、경제적 사회화의 진통이며、사회적 평등화의 진통이며、문화적 다원화의 진통이다. 그러나 이 사회에서는 인간의 변화가 병행되지 않는(사회)제도나(사회)구조의 변화만을 강조하는 것 같은 인상을 금치 못하고 있다. 새 인간이 태어나는 진통도 겪어야하지 않겠는가?
인간이 변하지 않는 한 새로 만드는、변화된 제도가 자동적으로「인간을 위하여」운영되기를 바라는 것은 요행을 바라는 것과 유사하게 보일수도 있다. 제도는 자동적으로 생기는 것이 아니다. 인간에 의하여 만들어지고 또 운영된다. 「변화된」제도의 운영이「변화되지 않는 인간」의 자의(恣意)에 예속되기 시작하면、훌륭한 제도라도 그 기능이 발휘되는 것이 아니라 변화되지 않은 인간의「시중」을 드는 정도에 불과할 수도 있다. 독재정치와 그 나라 헌법 간의 모순、노동자 착취와 그 사회 노동법간의 모순、침묵을 강요하는 폭력행사(자기 자신은 먼저 폭력、그다음에 강제협상)와 비폭력주의(다른 이에게는 절대 비폭력적 행동강요)간의 모순 등 역사 안에 그 사례가 너무도 많다. 이렇게 인간의「변화」없이 제도가 자동적으로 「인간」을 위한 제도로 변화되지도 않고 「인간」을 위하여 운영되지도 않는다.
실제로 인간은 변화하지 않은 채 어떤 제도를 바꾼다는 의미는 각자 자기에게만 유리하도록 바꾼다는 의미가 될 것이다. 어느 누구도 이러한 경향에서 면제되지 않았지만、문제는 그것이 너무 배타적으로 작용할 때 제기되는 것이다. 이 경우에는『하나의 같은제 도가 인간을 위한 제도로 변하는 것』이 아니라『하나의 제도가 다른 제도에 의하여 대치된다』는 의미이며、전(前) 제도를 자기중심으로 운영하던 이들이 후(後)제도를 역시 자기중심으로 운영할 이들에 의하여 대치되는 것에 불과하다. 그러나 전자도 후자도 다 변화되지 않은 인간이다.
김춘호
<神父ㆍ서강대 종교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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