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효와 문으로 이뤄진「교」는 때려서 효도를 가르친다는 뜻이다. 30여년간「교육」을 위해 외줄기 사도를 걸어온 고 김주만 선생이 효심이 지극한 것도 그때문일 것이다. 그런데도 그는 노모에게 용서를 빌며 자살함으로써 큰 불효를 범하고 만 느낌이 든다. 입시 부정에 대한 도의적 책임이 효심보다 더 무겁다고 판단이되었기 때문일까? 아무튼 선생의 죽음은 부조리와 부정이 고질화된 우리 생활에 큰 충격과 감동의 여운을 길게 남겼다.
▲효심에 대해서라면 교육계에 못지 않게, 아니 그 이상으로 강조되는 곳이「교회」가 아닌가 싶다. 교회의 위계질서는 하느님 아버지를 정점으로 해서 온통 어버이와 형제자매로 이뤄져 있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육친에 대한 효심도 강조하지만 그것을 초월한 영신의 어버이에 대한 효심이 크게 중요시된다. 신앙의 차원에서 성부께 대한 효심은 말할 것도 없고 목자에 대한 효심 또한 지극한 곳이 교회인 것이다. ▲따라서 신자들이 령신의 어버이인 사제의 생활과 노후에 대해 걱정하는 것은 당연하다. 공의회는 복음적 열의로서 가난을 실천하며 백성에게 봉사하기 위해 몸바친 사제들이 알맞는 보수를 받아야 하며 그것은 가난한 사람들을 얼마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부여할 수 있는 정도여야 한다고 교시했다. 동시에 질병 불구 연로 등으로 고생하는 사제들의 생활 보호를 위해 충분히 대처하라고 당부하기도 했다. ▲다행히 교회 내에서는 은퇴사제들을 위한 모금운동이 성직자들과 일반 신자들 사이에서 산발적으로 전개돼 왔다. 이제 이를 위한 전국기구 설치문제도 거론되고 있는 모양이다. 이 모든 것이 당연한 움직임이라는 데는 별 이의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간혹 볼 수 있듯이 성직자가 신자들에게 노후 대책을 요구하는 인상을 주면 좀 어색해진다. 그 이유는 종로 네거리에 오가는 사람을 붙잡고 당신들 노후 대책이 서 있느냐고 물어보면 당장 알 수 있을 것이다. 고 김주만 선생의 경우처럼 혈육 때문에 사후 걱정까지 해야 하는 것이 평신도이기 때문이다. ▲어떤 교구에서는사제들이 스스로 자기의 보수에서 얼마를 떼어 적금하는 방법으로 노후 대책을 세우고 있고 신자들이 이에 협조한다고 한다. 퍽 현실적이고 바람직한 해결책이라고 생각된다. 어쨌든 사제는『설마 굶어 죽겠는가』하는 자세로 사제직에 임하고 신자들은 령신의 어버이에게 효도를 다하려는 마음가짐만 잃지 않으면 아무런 어려움이 있을 수 없을 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