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은 2월 27일의 봉재 수요일부터 사순절을 맞이한다. 해마다 맞는 사순절이지만 이번은 화해의 성년 중에 맞이하는 사순절로서 특별한 의의를 찾아 보려고 한다.
사순절은 원래 극기와 보속의 시기로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죽으심을 묵상하면서 우리도 다 같이 기왕 있는 고난을 자진 만들어 이를 그리스도의 수고수난에 동참케 하여 봉헌함으로써 부활의 영복을 미리 맛보게 하는 데 그 근본 의의가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사순절은 동시에 우리들의 이웃 사랑과 화해 일치를 실치하는 시기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과거의 오랜 시간은 사순절을 지내는 데 있어서 극기와 보속의 면에만 지나치게 가중하였고 또 그것도 개별적인 것으로만 생각하여 온 느낌이 많았다.
따라서 이웃 사랑이나 화해와 일치를 가져오는 공통적이고 적극적인 면으로는 고려가 소홀했던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그러므로 금년의 사순절은 화해의 성년에 알맞는 것으로 새로운 뜻을 모색해 보자는 것이다.
오늘까지의 사순절 개념에는 봉재 시기로서 포착되면서 제를 지키는 때로만 인식되고 따라서 단식(대재)과 금육(소재)의 시절로서만 익혀 온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재 지키는 것에 대한 근원적 의의를 명시한 것은 이미 이사야 예언서에서 찾아볼 수 있다. 즉『나의 기뻐하는 단식은 악의 결박을 풀어 주기 멍에의 줄을 끌러 주며 압제 당하는 자를 자유케 하며 모든 멍에를 꺾는 것을 나눠 주며 유랑하는 나그네를 맞아들이며 헐벗은 자를 입혀 주며 또 네 골육을 피하며 스스로 숨지 아니하는 것이 아니겠느냐 (이사야 8-6·7)』
이 말씀은 바로 외면으로만 재를 지키는 단식과 금육에 대하여 정계하고 이웃을 사랑하는 덕행으로서만이 재 지키는 올바른 방법이 됨을 가르쳐 준 것이다. 이 말씀과 호응되는 그리스도의 말씀에서 보더라도 마태오복음서는『너희는 주렸을 때에 먹을 것을 주었고 목 말랐을 때에 마실 것을 주었으며 나그네 되었을 때에 따뜻하게 맞아 주었다. 또 헐벗을 때에 입을 것을 주었으며 병들었을 때에 돌보아 주었고 감옥에 갇혔을 때에 찾아 주었다.』(마르 25, 35-36)라고 하여 영복과 영복의 표준으로 삼으셨음은 실로 중대한 의의를 포함하고 있다.
만약에 우리가 순전히 개인적으로만 또 단식이나 금육 등의 고난 행위만으로서 사순절의 시기를 잘 지켰다고 생각하고 위에서 열거한 이웃 사랑의 실천이 없었다고 한다면 이는 이사야 선지자의 가르침이나 그리스도의 최후의 심판에 관한 선포에 정면으로 상충되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다.
교회가 75년 성년을「화해의 성년」으로 호칭하고 종래의 예 없이 3년 간의 준비 기간을 갖고 또 과거의「로마」중심 대교 중심의 방식을 지양하고 지방교회의 보편화 내적 쇄신의 실천으로 지향하는 데 역점을 둔 것을 볼 때에 오날날 교회는 단적으로 말해서「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반성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내적 쇄신은 곧 회개를 말하는 것이고 회개는 죄의 존재를 전제하는 것이며 그 죄란 바로 사랑의 결핍인 것이다. 이「사랑 결핍」의 죄로 말미암아 위로는 하느님과의 불화 옆으로는 형제들과의 불목 세계와의 소통이 초래된 것이다.
이에 교회는 일대 자각을 일으켜 지난날의 지나친 테두리를 벗어나 공동 구원의 구조를 재확인할 때가 온 것이다. 그러므로 오늘의 사순절 시기는 과거의 소극적 개인적 고난 극복 위주의 방식에서 뛰어넘어서 적극적이며 공동적이며 하느님과 인류 교회 안의 형제들 사이와 교회와 사회 사이의 화해와 일치를 이룩하는 고차적이며 광범적인 차원으로서 이행에 눈을 떠야 하겠다.
좀 더 구체적으로 한 예를 든다면 저 오지리 부인들이 사순절의 극기로서 우리 교회를 도와 주고 있는 사실은 널리 알고 있다. 우리도 사순절의 극기가 자기 자신에게만 그치지 않고 우리들이나 사회에의 사랑으로서의 적극적 표현이 있어야 할 때가 왔다고 본다. 다른 표현으로 말한다면 사순절을 고난의 사순절에서 사랑의 사순절로 관념 재구성 같은 것을 말하고 싶다.
과거의 고난과 고통을 회상하는 명상에 잠기는 것도 미덕의 하나이겠지만 그것보다도 부활에 대한 희망 사랑에서 오는 기쁨이 오늘의 현대를 사는 우리들에게 더욱 소망스러운 일이 아니겠는가.
이와 같이 사순절을 적극적 자세로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데 있어서는 무엇보다도 성직자들의 신자들에 대한 계몽과 수범이 절실히 요구된다.
한국의 오늘의 신자들은 아직도 2차 바티간 공의회의 기본 정신과 과거의 기존 인습 사이에서 방황하고 갈피를 잘 잡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대해서는 성직자들이 먼저 공의회 정신에 투철한 확신을 갖고 일반 신자들을 부단히 계몽 교육해 주어야 하겠고 또 고난의 극복이나 사랑이 실천 면에서도 성직자가 먼저 솔선수범으로 선도적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위의 두 가지 면에서 성직자 측에서 신자 대중의 신임과 기대에 부합되지 못하는 사례가 없지 않음은 유감스럽기 때문에 거듭 주마가편의 촉망을 드리는 바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