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수한 사람이 자기 이외의 것에 관심을 갖지 않는「무관심」속에 일상생활을 하는 것 같다. 하루의 일과를 마치고 나의 관심사가 무엇이었던가를 곰곰이 생각한다면 거의 대부분은「나」와 관련된 것 뿐인 것 같다.
한때 이 무관심이 덕으로 찬양 받은 때도 있다. 그럴 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고 설명도 그럴 듯하였다.
사상사(思想史)를 보면「무관심」이 처음으로 찬양 받은 것은 스토아 학파에서인 것 같다. 그들은 말하기를 사람이 쾌락의 매력 및 고통의 공포에 대한 무감동(無感動) 무관심이 덕(德)이라고 하였다. 사람이 주위의 좋고 나쁨에 흔들림 없이 우리의 목적에 이성적으로 충실할 때 생기는 무관심이었다. 칸트는「무관심」이 미적(美的) 태도를 결정짓는 것이라 보고 있다. 그는 말하기를 사람이 어떤 대상의 존재와 결부되는 일체의 관심과 무관심하게 성립되는 무관심성이 미적 쾌감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무관심의 찬양은 가톨릭 영성생활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고 본다.
하느님의 마음에 이르기 위한 초보적 단계는 말하는「이탈」은 바로 이 무관심에서 시작되는 것이리라. 그러나 이렇게 훌륭하게 설명된「무관심」이 우리 사회를 지배하면 좋은 것 같지만 결과는 그렇게 좋지 않았다. 이러한 무관심이 사람의 관심을 자기에게로 향하게 하였기 때문이다. 이제 사람들은 자기 이외의 것에 무관심한 상태로 바뀌었다. 한 가족이 함께 살면서 가족 전체보다는 자기에게 더 관심을 두고 이웃에 대해 무관심하고 자기가 모르는 것은 고사하고 아는 것이라도 자기 이해관계에 영향이 없으면 무관심으로 세상을 본다.
물고기가 물에 대해 무관심하듯 사람은 자기가 사는 세상과 우주에 대해서 무관심하고 나아가서는 교회와 하느님에 대해서도 무관심하다.
예수님은 착한 사마리아 사람의 이야기 중에서 강도에 칼을 맞고 쓰러진 그 사람에 무관심하였던 제관과 레위 사람에겐 언급이 더이상 없고 그에게 관심을 가졌던 착한 사마리아 사람에게는『너도 그와 같이 하라』고 명하심으로써「무관심」에 역점을 두시기보다는 무엇에 관심을 두라는 것인지 명백히 하셨다.
우리의 길은 무관심으로 하느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누구에게 관심을 둠으로써 하느님께 나아갈 수 있다. 우리는「무관심」의 방향에서「관심」에로 방향을 돌려야 한다.
이것도 저것도 아닌「무관심」의 상태가 회상의 것으로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느 편에서고 환영을 받지 못할 것이다.
단떼의 신곡(神曲) 지옥편 제3곡에는「평생 남 부끄러울 것도 자랑할 것도 없이 지내온 자」들이 하느님과 지옥에도 배척을 받고 세상도 그들을 잊은 상태에서 고통을 당하고 있음을 잘 노래하고 있다.
우리의 임무는 무관심으로 사라져가는 것을 관심으로 일깨워야 한다.
우리들의 인류에 대한 최대의 죄는 그들을 미워하는 것보다 무관심한 것이다. 우리는「언제 당신이 나그네 되셨오. 병드셨으며 감옥에 갇히셨습니까?」하고 문의해도 소용 없을 때가 있을 것이다. 우리의 길은 무관심으로 하느님에 이르는 것이 아니라 바로 관심으로 하느님에 이르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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