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우스신이 프로메테우스를 불러 말하기를「진흙을 이겨서 사람을 만들도록 하라. 모양을 우리와 닮게 하라.
너는 인간들에게 여러 가지 지혜를 주되 불사의 생명을 줄 수는 없다. 그리고 불(火)만은 절대로 주어서는 안 된다.」라고 말했다. 여기서 성서의 신화는 무화과 열매를 따 먹었고 그리스의 신화는 불을 훔쳤다는 데 공동적 죽음의 기원을 풀이한다. 누구든 이 세상에 태어난다는 사실은 죽음을 전제한 삶을 허락 받은 조건부 인생이다. 때문에 죽음의 자각은 삶의 실제성을 자각케 한다. 깊은 죽음에의 사색은 그만큼 강렬한 생활에로 사람을 이끈다. 죽음을 생각지 않음도 미련하거니와 그렇다고 죽음만을 생각함도 비겁하다. 오직 죽음 그 자체를 전제한 현세의 생존은 당연한 권리며 삶에 대한 강렬한 집착으로 변용시켜야 한다. 이것은 사실대로 되어지고 있다. 그런데 고전주의의 이상은「인간의 신화」(神化)에 있었고 인간을 신의 모상화 한다는 것이다. 현대는 신의 모상을 닮지 않으려 한다.「무엇 때문에 사는가? 어떻게 살아가는가?」를 묻지 않고「구체적 개별적으로 어떻게 존재하느냐」(니체의 실존주의)가 문제시 된다. 톨스토이는 값싼 출세주의와 고통 없는 행복을 추구하는 현대인을 이반이라는 주인공을 통해서 죽음과의 실존과 부딪쳤을 때 자신을 만나게 한다. (이반「이리치의 죽음) 죽음을 넘어 인간의 구원이 있어야 한다. 맡은 직무에 충실한 이반은 젊었었다. 그러던 그가 불치병으로 죽음이 임박한다는 것을 자각한다.「그놈의 것이 죽음이란 것이) 하면서 아픔과 죽음의 생각을 쫓으려 한다.「도대체 그놈만이 진실하단 말인가?) 누군가가 애무와 키스와 동정의 눈물을 흘려 주기를 원한다. (사람들 앞에서는 권위와 점잔을 가장하지만) 그는 무서운 고독 인간의 잔인성 신의 잔혹함을 원망한다.「신이여 당신은 어째서 이런 일을 합니까, 무엇 때문입니까?) 외쳐도 신은 대답 없다. 그러면서「고통을 면하는 일이다. 사는 일이다. 어떻게 사느냐?) 「그건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같이 사는 것이다)라고 자문자답한다. 마침내 죽음을 직면할 때 오히려 더 태연하여진다. 그로 인하여 구원을 받은 듯 중얼거린다.「참으로 기분이 좋다. 그런데 그 아픔은 어디로 갔을까? 이것 봐, 어디에 있는가? 아픔의 신은 죽음은 그놈의 죽음은 어디에 있을까?) 그 후 이반은 친숙해진 죽음의 공포를 찾으나 찾아낼 수가 없다.「아! 참으로 기쁘다)「이젠 죽음도 다 끝났단 말이다. 이 이상 죽음이 있을 리 없다) 하고 엷은 미소를 머금은 채 운명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신이 죽음과 함께 임석하고 인간이 견디는 고통의 능력을 관망함을 엿본다. 죽음의 현존은 더욱 확실한 구원을 요청한다. 여기로부터 한 걸음도 도피할 수 없음을 안다.「꼰숨마뚬·에스트!」 (다 마쳤다)라고 십자가의 그리스도의 종언은 종지부가 아니라 그의 죽음으로부터 인류 구원이 성취되며 죽음의 실존을 통한 하느님께로 귀의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죽음의 이 공통분모 위에서 평범한 지리를 깨닫게 된다. 죽음은 삶의 다음 차례에 온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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