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들어 교구 벽이 높다、또는 높아간다는 이야기가 비등해지고 있다. 교구벽이란 그 실체가 쉽게 드러나지 않는 것이기 때문에 상당히 막연한 개념이기도하다. 그리고 구체적으로 어떠한 사항이 교구벽인가 하는 것도 규정하기가 상당히 곤란하다.
그런데 왜 많은 신자들이 교구의 벽이 있음을 느끼고、또 그 벽의 골이 점점 깊어져가고 있다고 느끼는 것일까. 그러면 교구의벽은 꼭 무익하기만 한 것인가. 교구수가 많다보면 외형적인 교구의 벽인 교구 관할영역의 구분은 당연한 것이다.
따라서 교구벽이 높아간다는 우려의 소리는 외형적인 벽은 있되 내부적인 벽은 곤란하다는 견해일 것이다. 말하자면 가톨릭의 특성인 보편성 위에서 다양성속의 일치가 이 내부의 벽으로 인해 행여나 금이 가지 않을까 하는 우려 때문일 것이다.
교구분할은 근년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현재의 교구분포도는 이미 70년대에 짜여진 골격이다. 그 가운데서 제주교구를 제외하고는 60년대의 교구분포도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
교구벽은 일단 80년대에 강하게 부각되고 있는 현상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면 60년대나 70년대에 별로 느끼지 못하던 교구벽의 실체는 무엇인가. 한국교회의 교구분할은 1911년에 처음 시작되었다. 조선교구 설정 후 74년만에 처음으로 교구가 분할된 것이다. 이후 계속해서 교세증가에 따라 교구분할이 이루어졌으나 일제치하、해방、남북분단 등의 와중 속에서 교구벽을 느끼기란 어려웠으리라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1962년 교계제도설정이전까지는 정식교구가 아닌 교황청직할의 지목구ㆍ대목구의 형태였기 때문에 교구의 구분은 있었으나 그 구분조차 느끼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결국 오늘날 이야기되는 교구벽은 1962년 교계제도설정이 전환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교계제도가 설정된 60년대나、이후 70년대까지도 교구벽이라는 말이 별로 없었던 것은 교계제도는 설정되었으나 교계제도에 대한 인지가 별로 없었고 교세가 미약한데도 그 요인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일반적으로 이 같은 교구벽은 바티깐의 통치방법에서 기인한다고 보는 견해가 강하다. 즉、바티깐은 극단적인 민족주의(내쇼날리즘)를 불용한다는 것이다. 지역교회의 규모가 커지고 민족주의에 고무되다 보면 결국 반(反)바티깐화의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결국 이 때문에 지역교회의 교세증가에 따라 교구를 증설、분리시킴으로써 통치의 극대화를 도모한다는 관점이다.
대신학교의 신설은 한국교회의 교계제도、그리고 한국교회의 전체적인 흐름과 궤를 같이 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광주에 제2대신학교가 설립된 해는 1962년도로서 이 해에 한국교회는 정식으로 교계제도를 갖추었다.
그러나 제2대신학교 설립 후 60년대까지만 해도 한국교회는 전국적인 성향이 강했다. 교구차원의 큰 행사는 드물었고 익숙하지도 못했다. 교계제도 설정 후에도 10여년 이상씩 교계제도 설립이전의 관행에서 탈피하지 못한 결과일수도 있다.
73년도에는 주교회의 차원에서 당시 양 대신학교인 서울ㆍ광주대신학교의 통합 움직임이 거론되기도 했다. 양 대신학교 통합론은 유야무야 끝나버렸지만 한국교회의 큰 흐름이 교구차원 보다는 전국차원 지향적이었음을 입증해주는 좋은 예라고 볼 수 있다.
제2차 바티깐공의회 이후 도입된 각종 신심단체ㆍ액션단체들 역시 전국 단위에서 시작하여 교구 단위로 확산되는 방법이 자연스러웠다. 이러한 배경에는 서울중심의 사회체제 역시 한몫을 담당하기도 했지만 전국차원 지향적인 습성에 익숙하였던 것이 한국교회의 큰 흐름이었다.
이러한 전국 차원 지향적이었던 한국교회가 교구체제 중심으로 전환하기 시작한 분기점으로 1975년 성년(聖年)을 꼽을 수 있다. 일부 신심ㆍ액션단체들의 행사 외에는 교구민 전원이 참가하는 행사가 없었던 당시 전국 각 교구별 성년행사는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다.
본당차원에서 맴돌던 주보(週報)가 교구 주보로 한 차원 올라선 것도 1975년 성년행사 전후였다. 그 이전에는 본당주보내지는 전국지(가톨릭신문ㆍ경향잡지)가 모든 역할을 해냈다. 여기서도 전국차원 지향적이었음이 쉽게 발견된다.
전국차원 지향적이었던 한국교회가 교구차원으로의 전환을 이룩한 또 하나의 요소는 70년대 중반이후의 대사회문제에 기인하고 있다. 교회내적인 문제에 의견불일치의 노정이 거의 전무하였던 주교단이 대사회문제의 합일점을 도출해내기 어렵게 되자 교구중심의 교계제도가 부각되고 본래의 모습을 강하게 추구하게 되었다고 볼 수 있다.
결국 전국신학교가 관구신학교를 거쳐 교구신학교 체제로 돌입한 것은 80년대로서 한국교회의 큰 흐름이 교구중심으로 정착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 나타난 현상임을 알 수 있다.
결국 전국신학교가 관구신학교를 거쳐 교구신학교 체제로 돌입한 것은 80년대로서 한국교회의 큰 흐름이 교구중심으로 정착된 것은 80년대에 들어서 나타난 현상임을 알 수 있다.
1981년 여의도 관장에서 거행된 조선교구 설정 1백50주년 기념행사는 한국교회 모든 교구의 뿌리가 하나임을 확인해주는 동시、교구의식을 강하게 심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대구가톨릭대학(1982년)과 수원가톨릭대학(1984년)이 개교하였으며 1984년 한국천주교회 2백주년을 지낸 후 대신학교는 교구신학교 체제로 전환하게 되었다.
이같이 60년대 이후 대신학교의 운영체제는 한국교회의 큰 흐름과 맥을 함께하면서 변화되어 왔음을 발견할 수 있다. 80년대 초까지만 해도 거론돼온 여러 대신학교의 연구와 통합운영문제가 별 진척이 없는 것도 따지고 보면 이 흐름 때문에 아닌가 생각된다.
교구벽을 느끼면서 이제는 본당 간에도 벽이 쌓여간다는 이야기도 조금씩 나오고 있다. 벽(담)을 느낀다는 것은 어떠한 의미에서건 바람직한 현상은 아니다. 「예수님은 담(벽)이 없으셨네」라는 장일순선생의 본보 창간62주 기념 휘호는 마음에 와닿는 내용이다.
고국상 <편집국장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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