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는 기도인데
어떤 젊은이가 침을 튀겨가며 이런 말을 하였다.
『예수님께서는 저의 기도를 꼭 들어 주십니다. 정말 감사할 뿐입니다. 너무 너무 감사해서 사는 것이 너무 너무 행복합니다.
한 가지 예를 들겠습니다. 제가 기차를 탔습니다. 그 기차에는 설을 쇠러 가는 사람들로 발 들여놓을 틈도 없었습니다. 좌석표도 소용없었습니다. 움직일 수가 있어야 찾아가지요. 기차가 달릴 때 저는 기도했습니다. 「하느님 먼 곳을 가는데 이렇게 서서 갈 수 있을까요. 도와주세요」. 기차가 두 정거장 가서 쉴 때였습니다.
차창에 제가 아는 선배형이 보였습니다. 그는 그 역의 높은 사람이었는지 번쩍번쩍하는 모자를 쓰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내가 아는 척을 했더니 달려와서 나를 내리라고 하더니 자리 하나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편안히 집에 올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그 일을 잊을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감사하고 삽니다』
◆다른 시각
나는 그의 이야기를 듣고 이런저런 생각을 해 보았다. 그는 젊은이였다. 그렇다면 기차에 빽빽이 타고 있던 사람 중에는 수염이 허옇게 난 할아버지도 있었을 것이다. 거기엔 꼬부랑 할머니도 있었을 것이고 아기를 업은 부인도 서있었을 것이다. 그 뿐인가. 설을 쇠러 간다면 공장에서 하루에 14시간씩 뼈 빠지게 노동하여 피골이 상접한 가련한 공원 아가씨도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아랑곳하지 않고 젊은 놈이 혼자서만 편안한 의자에 푹신히 몸을 파묻고 고향까지 간 것에 대하여 고마워하고 있는 것이 잘한 것인가? 아니면 이렇게 기도 했어야 하지 않았을까.
『주님、여기 수많은 사람들이 고향산천이 그리워서 갑니다. 병약한 사람들도 많습니다. 이들이 어느 누구 하나 아프지 않고 고향까지 무사히 갈 수 있게 하여 주십시요. 저야 팔다리가 튼튼하니까 걱정없습니다. 저를 혹시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면 제게 소명을 주십시오. 이 힘센 팔로 그들을 힘껏 도와 주겠습니다』
◆생각을 바꾸어야
세상은 점점 자기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풍조에 젖어 들고 있다. 나를 위하여 세상모든 것이 존재해야 하는 것처럼 되어만 간다. 신앙인도 나를 위한 기도、나만 잘되게 해달라는 기도를 드린다. 어쩌다 그것이 성취되면 거기에 도취되어 희색이 만면하고 마치 하느님께서 자기 종이 되어 꾸벅꾸벅 모든 것에 다 순종하여 준다는 그릇된 생각이 파고든다.
남들은 피골이 상접하여 굶고 있는데 나만은 돈을 잘 벌어 잘 먹고 있으니 하느님께서 이리도 나를 사랑해 주시는 것에 감사하지 않을소냐하며 『하느님 참 감사합니다』한다면 그가 드리는 감사의 기도가 맞는 기도일까? 아니면 『주님 제가 돈을 좀 벌었으니 아낌없이 저의 재산을 가난한 이들을 위하여 내놓을 수 있게 용기를 주십시오』하고 기도해야 옳을까?
생각을 바꾸어야 한다. 오늘 내가 드리는 기도가 정말 타당한 것인지 아니면 문제의 핵심을 외면한 채 자기 편할 대로 세상을 내다보며 살아가고 있지나 않은지、바리사이파 사람이 성전에서 드린 기도는 그가 생각하기에 온당하고 적합한 기도였다. 그에게 있어서 조금도 부끄러움이 없는 기도였다. 그러나 그는 기도의 핵심을 외면한 채 자아도취에 빠져있었다. 그가 생각하기로는 세리가 드린 기도는 자기에게 해당이 안되며 그럴 필요도 없다고 생각하였다. 그에게 착상의 변화란 불가능하였다.
우리가 지금 드리는 기도가 과연 합당한 것인지 헤아려야한다.
우리도 착상의 변화가 요구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나만을 위한 기도만을 드리며 나이외의 사람들에 대하여 조금도 생각해보지 않고 오로지 하느님께 복을 달라는 기도를 줄줄이 엮어나간다면 거기에 분명 함정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크리스찬에게 있어서 1인칭은 「너」이다. 나만을 위한 기도가 아닌 「너」를 위한 기도가 선행되지 않는 한 우리의 기도는 이기적인 기도가 될 소지가 역력하다.
전쟁터에서 동료들이 총을 맞고 쓰러져 신음하고 있을 때 그들을 돌봐주기는커녕 나만 혼자 살아보겠다고 뺑소니를 친다음 『하느님 감사합니다. 저는 죽지 않고 살았습니다. 이 얼마나 크신 주님의 은혜입니까?』하고 기도한다면 주님께서 어떻게 받아들이실까? 또한 하늘에서 내려보는 동료들은 어떤 눈으로 그의 기도하는 모습을 바라다볼까? 생각해볼 일이다.
가끔 생각나는 영화장면이 있다. 영국의 보물선이 아프리카에 가서 금을 탈취해 오는데 금만이면 얼마든지 괜찮았을 것을、사람들을 강제로 잡아 싣고 팔아먹으려고 항해를 한다. 노예들은 쇠고랑에 채워지고 노를 죽도록 저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한눈을 팔면 사정없이 가죽채찍이 등줄기에 감긴다. 거기선 피가 솟구친다. 그러나 때리는 자의 손은 멈추지 않는다.
저녁이다. 백인들은 갑판위에 모여 찬송가를 부른다. 하늘을 우러르며 감사기도를 바친다. 이 해괴망칙한 기도를 하느님께서 어떻게 받아주셨을까? 비록 영화이긴 했지만 그때 나의 가슴은 분통이 터질 것 같았다. 아마 하느님도 그러하셨을 것이다. 오늘 우리의 기도가 잘못된 기도는 아닌지 생각해볼 일이다.
이번 호부터는 최기산 신부님께서 수고해주시겠습니다. 3월 한 달간 집필해 주신 김춘호 신부님께 감사드립니다.
최기산
<신부ㆍ인천교구사목국장>
◇1975년 사제서품
◇1982년 해안동주임
◇1985년 심곡 1 동주임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