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나름대로 인생관이 있고 신념이 있어 근 20년을 강직하게 살아온 충실한 공무원이 얄팍한 봉급 봉투를 들고 무거운 걸음으로 집에 들어왔다. 의당 기쁘고 가볍게 돌아와야 할 날인데도 그나마 적은 봉급에서 이것저것 제하고 보니 손에 넣은 액수가 너무나 적어 창피하기도 했지만『여보 당신은 그렇게도 주변이 없수. 다른 사람들은 같은 공무원이라도 돈을 잘 벌던데 20년 봉급쟁이 월급이 요것뿐이란 말요. 혼자서 정직하게 산다고 누가 알아주고 사회가 바로 잡히나요』하던 아내의 초라한 모습과 말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자기 아내한테마저 불신을 받고 바보 취급을 받는 것이 화가 났지만 생각해 보면 15년간 5남매를 키우고 가르치며 알뜰한 살림을 하면서도 큰 불평 없이 살아온 아내에게 호강 한 번 제대로 시켜주지 못한 자기가 바보처럼 생각되었다.
정직함이 직장에서 바보로 취급되고 집에서는 무능자로 낙인되어 가정 파탄까지도 가끔 있는 일이고 보면 이런 것은 약과일 것이다. 흔히『뭘 그래 적당히 해 둬』하는 말을 듣는다.
원래「적당」이란 말은「적합하고 의당함」의 준말인데 언제부터인지 적당이란 말이「어불정, 흐지부지, 우물쭈물」등 옳고 그름을 가리기보다 자기에게 이롭도록 불의와 타협하는 대명사로 쓰여지고 있다. 법규를 위반했을 때나 문제가 생겼을 때 또 부당하게 무슨 일을 시킬 때『적당히 합시다. 적당히 처리하시오』한다. 만일 이때 정의의 편에 서서 시비를 가리면 융통성 없는 사람, 꽉 맥힌 사람, 시대에 뒤진 사람으로 바보 취급을 한다.「적당히」란 말마디는 우리가 무의식 중에 쓰는 일상 용어로서 대단히 편리하고 실용적이며 다목적적 단어인지 모른다.
그러나 그 뜻을 얼밀히 캐 보면 현대인들이 정신적으로 얼마나 무서운 병에 걸려 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며 또 현대인들의 잠재적인 의식 구조를 대변하는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선악을 가리기 이전에 실리를 추구하고 진리를 따지기 전에 현실의 만족을 찾는다.
이를 위해 돈이나 재물이 필요하게 되고 재물을 얻기 위해 권력에의 매력을 갖게 되고 그에 아부한다.
이 목적 달성을 위해 가진 권모술수나 지략이 생기게 마련이다.
이런 연쇄반응은 비단 개인에서 그치지 않고 사업 체제에도 깊숙히 파고들어「적당히」 타협하고 속여서 회사를 발전시키면 그것이 유능한 경영자요 사원으로 취급된다.
들통이 나서 무위로 끝났지만 그 대표적인 예가 많은 분들의 분노를 사게 했던 74억 부정 대출의 박영복 사건이 아닐까.
하기야 신자들 중에도 참된 신앙을 갖기 위함보다 집안의 재앙을 면하고 병을 고치고 취직 입학이 잘 되고 사업이 잘 되기 위해서 교회에 나오고 기도를 드리는 약삭빠른 분들도 있으니 할 말이 없지만 그러나 모든 사람들이 바라는 것은 이러한 못된 유능한 인재가 아니라 성실한 바보임에는 틀림없을 것이다.
이런 바보의 대표자요 모델이 예수님 같다.
누구나 더 많이 갖기를 원하고 자기를 알아 주기를 바라며 보다 편하게 살기를 원하는 것이 인간상정인데 예수님은『나를 따르려면 모든 것을 버리라. 먹고 입을 것 걱정하지 말라. 말석에 앉으라. 가난한 사람이 복되다』는 등 터무니 없이 가르치셨고 실천하셨으니 말이다.
그러나 아무리 재주를 피워 잘 먹고 잘 지낸다 해도 가시 위에 앉아 있는 것처럼 마음이 보채이는 것보다는 어렵지만 옳고 평화 속에 조촐히 사는 것이 낫지 않을까. 예수님 같은 바보가 하나라도 더 많아져서 그 좋은 재능과 두뇌를 선용하는 분들이 늘어날 때 정녕 바람직한 사회가 될 것 같다. 『잘 먹어 피둥피둥 살찌는 돼지보다 고통과 싸우면서 사는 내가 복되다』는 어느 철인의 말이 되새겨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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