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일은 우리 한국천주교회 초대 사제이며 순교자요 또한 한국 천주교회 모든 사제들의 주보이기도 한 김대건 신부의 축일이다. 이미 복자품에 오른 지도 49년이나 되었으니 성인으로 추앙하자는 우리 모든 신자들의 뜻도 간절하다. 그러나 시성의 문제는 우리의 열의만으로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의 뜻을 성청에 전달은 하고 있다.
김 신부는 자기의 뜻을 성청에 두고 한 번 결심한 바를 그 어려운 박해시대인데도 불구하고 일관했던 것이다. 그 시대의 교육 형태는 개개 마을 의 훈장이 동리 아이들을 모아 서당에서 천자를 가르치는 것이 고작이었고 또한 그것이 유일의 교육 방법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보면 모든 생활 습성이 다르고 언어가 다른 외국까지 가서 한 번도 듣도 보도 못한 현대 학문을 하기란 얼마나 어려웠을 것인가는 가히 짐작하는 바다.
더구나 그 시대만 해도 신학 공부에 절대 필수조건이었던 라띤어를 배우고 그 말로 철학과 신학을 배운다는 것은 그 어려움 역시 얼마나 컸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알 수 있다. 서품 된 후에도 죽음을 무릅쓰고 귀국 후 숨어다니며 전교를 했고 우리 민족에 복음을 전하기 1년여라는 짧은 시간에 아리따운 25년이라는 나이로 하느님과 그 교회를 위해 칼 아래 이슬로 사라졌다.
이런 훌륭하고 모범적인 복자를 주보로 모신 우리 한국 사제들은 행복하다 하겠다. 5일은 또한 김대건 신부의 축일인 동시에 우리 한국 교회의 또 다른 경사 곧 전국 각 교구에서 12명의 새로운 사제가 탄생했다는 사실이다.
이들 역시 수삼년의 연구 끝에 거룩한 사제품에 오르게 된 것을 축하하기 앞서 꾸준한 노력과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표시로 자기 자신을 송두리채 바치고자 하는 그 마음에 더 엄숙함을 느낀다. 부디 이 새로 서품된 사제들 앞에 하느님의 은총이 풍성할 것을 우리 다 기도하며 마음에서 우러나는 찬사를 아끼지 않는다.
그러나 지금 성청에 뜻을 두고 신학교에 몸담아 둔 여러 신학생들에게 한 가닥 바라고 싶은 것이 있다면 부디 훌륭한 사제가 되어 달라는 말이다. 한마디 말로써「훌륭한 사제」라 하면 무엇을 뜻하는 것일까. 그것은 두말할 것도 없이 바로 우리가 믿고 있는 그리스도의 상일 것이다. 신인 그리스도는 참 하느님이시고 동시에 참 사람이다. 그러기 때문에 하느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의 중개자이고 자신을 죽음의 제물로 바치며 인류의 죄를 대신 보속했고 자기의 부활로서 우리를 영생으로 이끌었다. 바로 이것이 우리가 바라고 싶은 한 가닥 마음이다. 신인이 못 되는 사람에게 신인을 닮으라는 우리의 요구가 과대하다고만 할 수 있겠는가.
흔히 하는 말로『신부도 사람이 아니냐』는 등의 말로 사제 자신들이 어떤 어려움을 감추려는 인상을 줄 때는 마음의 서글픔을 금할 길 없다. 우리가 바라는 사제의 상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자신의 약함을 외적으로 안 드러냈으면 하는 것이다.
비록 신자 자신들은 못하는 희생이라도 또 신자 자신이 못하는 희생이기 때문에 사제만이라도 해 주었으면 하는 아쉬운 마음을 신자들의 과망이라고만 하기에는 너무 안타까운 일이 아닐까 생각한다. 항상 말하는 참된 사제의 상은 가장 인간적으로 남을 이해해 주는 너그러움과 착한 생각과 성스러운 생활이다.
이것을 우리는 신학생들에게 바란다.
신자들에게 바라고 싶은 것은 모든 사제들에게 바라는 바로 그것을 신자 자신들이 이해해 주었으면 하는 것이다. 우리가 원하는 사제의 상을 말했다면 옳은 신자로서의 상도 없지 않을 것이다. 신도 아닌 사람에게 신인의 노릇을 하라고 바라는 마음이 있다면 왜 자신들은 바라기만 하고 거기에 대한 이해를 갖지 않으려 하겠는가마는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결국 사제들에게 많은 책임과 의무를 지워놓고 또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원하면서 자신들의 생활은 별로 반성하는 점이 적게 보이는 것이 현실이 아닌가 싶다.
한 예를 든다면 자신들의 불성실한 생활 즉 신앙생활에 열심히 없는 것을 신부들에게 그 탓을 돌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심지어는『저 신부는 인상이 좋지 않아 본당에서 빨리 떠났으면 좋겠다』한다. 이런 신자들은 대개가 완전한 사제상을 요구한다. 반성해야 할 일이 아니겠는가. 결론적으로 말할 때 신자 없는 목자를 생각할 수도 없을 것이고 목자 없는 양도 생각할 수도 없다. 양자는 불가분의 사이여야 하고 서로가 자기의 처지를 주장할 것이 아니라 서로가 남의 처지를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옳은 마음가짐이 아니겠는가. 현대는 대화의 시대라하지만 대화는 자기 주장만 내세우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남의 말을 잘 들어주고 이해하려는 데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런 자세가 서로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사제는 사제대로의 옳은 사제의 상을 추구해야 할 것이고 신자는 하느님 백성답게 자기의 충실한 의무를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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