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1월1일
계축년 새해다. 전국 방방곡곡의 신자들이「새해를 착히 지내고 다행히 범죄치 않는 특은」을 주시도록 하느님께 기도하고「천주의 영광과 모든 이의 구원을 위해 생각과 말과 행위를 온전히 주께 바칠것」을 다짐하는 날이다. 또한 오늘은 온 인류의 소망인 평화를 기원하는 평화의 날이기도 하다.
돌이켜보면 지난해 임자년은 다극시대(多極時代)의 문을연 미국과 중공의 해영(解永)을 기점으로 수많은 충격적인 사건들이 음속적(音速的)으로 진행되는 과정을 몽롱히 지켜본 나날이었다.
평화통일의 꿈을 안고 발표된 7ㆍ4 남북 공동성명과 8ㆍ3사채동결 조치에 이어 남북 적십자 회담과 남북조절위원회가 서울과 평양에서 번갈아열리는 가운데 비상계엄령이 선포되고 국회가 해산되고 새헌법이 제정되고 통일주체 국민회의가 구성되고 대통령이 99.99%의 득표율로 재선되는 등등 천지개벽 이래 가장 급속한 변화가 숨막히게 속출되었다.
어떻게보면 지난해는 현대 과학기술을 총동원한 힘에 의해 모든 것이 계속 마취된 상태에서「자유」의 지체들이 어느새 절단되고 그 주요 기관이 하나씩 둘씩 마비되는 경황속에 비인간화의 고속도로를 가속으로 질주해온 1년이었다.
내밀한 양심의 소리와는 정반대되는 말과 행동으로 능청을 떨어야만 자리를 유지할수 있고 삶을 이어갈수 있는 현실속에서 우리 사회와 개인의 가슴 가슴에 뿌리박혀진 비인간적 요소는 분명히 반유신적 독소(毒素)가 아닐수없다. 이 독소는 인간사회를 지탱하는 가장 원초적인 상호신뢰의 미풍을 망실(亡失)시켜 목자와 양, 지도자와 피지도자, 기성세대와 새로운 세대, 친구와 동료사이, 심지어 가족끼리도 상호불신하는 풍토를 낳았고 이웃간에는 소가 닭을 보듯 닭이 소를 보듯 저주보다 무서운 무관심주의와 기회주의적 개인주의를 고착시켜 놓았다.
이같은 비인간적 현상은 국민 개개인의 행복 추구와 복지 증진의「수단」이어야할 정치와 경제가 도리어「목적」이 되어 인간위에 군림하면서 인간의 존엄성을 짓밟는 과정에서 결과된 업보의 하나임을 부인할수는 없다.
그동안 교회일각에선「구원사업에 본분을 두는 종교라 할지라도 이같은 현실의 구체성을 떠나서 사고하면 관념화의 공전속에 무애(無愛)와 위선을 범하게 될 위험이 있다」고 경고한바 있지만 궁색한 명분을 찾아 아늑한 무위(無爲)와 달콤한 위선을 고집하거나 비인간화에의 참여를 교회의 사회참여로 착각하는 경우가 없지 않았고 수난의 낌새가 비치자 피흘려 교난(敎難)을 겪은 순교자들의 겁먹은 후예답게 자기보호에 급급, 「주님과 함께 라면 감옥에 가도 좋고 죽어도 좋다」던 단심(丹心)이「무슨 소리를 하고 있소 나는 그 사람을 모르오」로 변심하는 사도 베드로적 전환(轉換)의 추태도 없지않았는듯 하다.
이러는 동안 인간다운 인간의 얼이 송두리째 상실되는 비인간화의 과정에 제동을 걸지 못했고 안으로 곪아가는 한과 상처를 가까스로 감추면서 연타되는 충격에「소 탄 양반송사 결정하듯」이래도 끄덕 저래도 끄덕하는가운데 임자년은 저물었고 계축년 새해의 동이 텄다.
이제 우리 모두의 간절한 소망은 지난해에 품은 한과 입은 상처를 기적적으로 치유하고 비인간화의 독소를 제거하면서 인간회복과 영원한 가치를 창조하는데 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얼마전까지만 해도 우리는 공산주의자들의「비인간」을 비방함으로써 우리의 반공정신을 고취시켰고 우리의 힘이요 자랑인 자유민주 정신을 함양해 왔지만 지금은 저들의「비인간」을 그전처럼 자신있게 비방할수 없는것은 비단 7ㆍ4성명의 상호비방 금지조항 때문만은 아니라는 현실을 직시할때 우리의 이 소망은 반드시 달성돼야할 지상과제임이 분명하다.
송구영신하는 새해 새아침이라고 해서 묵은 것은 죄다 송(送)하고 새것이면 모두 영(迎)할것이 아니라 오히려 해묵은 소망을 소생시켜 이를 달성하기 위해 진력할것을 결심하는데 새해의 의미가 있다.
먼저 교회의 볼수있는 기초이신 주교님들이 명령할줄 아는 슬기를 배우고 성직자를 포함한 모든 신자들은 비둘기 같이 순박하게 순명하는 미덕을 닦아 일치된 힘으로 인간화의 길을 터야겠다. 인간화의 길은 바로 진리와 생명의 나라, 거룩함과 은총의 나라, 정의와 사랑과 평화의 나라로 통하는 길이다.
사도 바오로도『너희는 이 세상 풍조를 따르지 말라』고 엄명하시면서 하느님과 인간에게 봉사하도록 정해진 인간활동을 죄의 도구로 변질케하는 허영과 악의에 찬 정신을 따르지 말라고 엄중히 경계한바 있다.
이제 우리는 무위와 위선과 비인간화에의 길목에서 서성거리는 싱거운 소금, 침침하지도 않는 빛, 주검같이 맥없는 생명이 되지 말고 양심의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 양심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느님의 명령을 경청함으로써 짜디짠 소금, 어둠을 환히 밝히는 빛, 약동하는 생명이 될 것을 결심해야겠다. 양심속 깊은곳에 심어진 하느님의 법을 준수하기 위해 어떠한 유혹에도 굴하지 않고 그리스도를 따라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질 때 우리의 해묵은 소망은 언젠가 반드시 이루어져서 절망 대신에 희망을, 부조리 대신에 정의를, 폭력 대신에 평화를 주는 생명의 교회가 될것이다.
새해에 독자와 신자여러분의 가정에 주님의 강복이 풍성할 것을 기원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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