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국에서 투고료로 온 소액환을 바꾸려고 우체국으로 가는 길이었다. 살며시 부는 봄바람 속에, 모짜르트의 혼 협주곡이 스며있는 것 같고, 어린아이의 유쾌한 흥얼거림이 들리는 듯 했다. 양품점 진열대에 걸려진 화사한 옷들이 날 유혹하지만 보는 것만으로도 난 즐거운 마음이었다.
지하도로 들어가는데 초라한 옷을 입은 어느 할머니가 구걸을 하며 앉아계셨다. 동전을 꺼내려다 귀찮은 마음에서, 냉담하게 지나가는 다른 사람들처럼 그냥 지나쳤다. 우체국에서 일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에 다시 그 할머니를 만났다. 1백50원을 지갑에서 꺼내 무심코 할머니에게 드렸다.
적은 돈을 받으신 그 할머니는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마음으로 고개를 숙이며 간곡히 고맙다고 하시는 것 아닌가. 할머니의 얼굴은 겸손함으로 하얗게 빛났다.
도리어 내 자신이 미안하고 부끄러워서 그 자리에 오래 있을 수 없었다. 마치 선생님께 야단맞고 난후, 뛰어가는 그런 심정으로 길을 걸었다. 내 자신에 대해서는 얼마나 관대한가, 나의 욕망이나 욕심에는 이유 없이 순응하고….
성서에 보잘 것 없는 자에게 한 행동이 곧 예수님에게 한 것이라 했지만 주님 보시기엔 불쌍한 이들에게 인색한 내가 정말 보잘 것 없는 자로 비쳤을 것이다. 『항상 기뻐하십시오, 인생은 지나갑니다. 그러나 주님을 위해 행한 우리의 행위는 남을 것입니다』라는 테클라메를로 수녀의 말이 날 더욱 부끄럽게 한다. 하늘에 쌓은 보화가 별로 없는 내 자신, 신자로서 초조한 마음뿐이다.
그러나 장미의 계절인 이때, 주님이 더 많은 재물이나 명예 그리고 사랑을 주시지 않더라도 아름다운 이 계절의 신비와 부활의 축복만으로도 행복한 신자, 노력하는 주의 종으로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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