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존경하는 한 성직자가 무슨일로 내게 조그만 문의를 하시던 자리에서 문득 당신 서가로 가시더니 한권의 책을 들고 오셨다. 그것은 뤼시엥 제르파뇽이 지은「가난한 기도자」라는 책이었다. 이 책을 읽어보았느냐고 물으셨.다 내가 못읽어 보았다고 하니까, 가지고 가서 읽어보라고 하셨다.
이때 그 어른은 내게 이 책을 빌려주신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크지 않은 규모의 책이므로 그냥 내게 주신 것인지도 모를일이라고 생각된다.
그 자리에서는 물질에 대한 소유권 문제가 의식되지 못했다. 그 후에도, 빌렸다가 반환한다는 등의 비속한 거동이 내키지 않아 그냥 그 책을 가지고 있다.
가지고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나는 그 책을 때없이 되풀이하여 읽고있다. 나는 책을 읽을때 깊은 감명 이라든가 기억해야 할 중요성을 느끼는 대목에 연필로 줄을 긋는다든가 하지를 않는다. 세상의 재화라는 것은 사람들이 하느님으로부터 일시 위탁받았을뿐 완전한 소유권이 있는것이 아니라는 생각은 옳지만 그 생각을 실천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책이라는 물질의 경우에는 그 실천이 비교적 힘들지 않다. 그러므로 책속에다 줄을 그어 놓는다거나 책 뒷쪽에다 주인의 이름을 쓴다거나 도장을 찍는 일이 나로서는 모두 내키지 않는 일이다. 책은 그냥 순수한 존재여야 할것 같다. 그런데 그 책의 어느부분들은 불가피하게 다시 찾아보야야할 필요가 있게된다.
그런때에 그 부분들을 정확하게 그리고 손쉽게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그것이 수수한 갱지로 된 책인 경우 나는 그 주요한 글들이 있는 페이지의 귀퉁이를 조금씩 접어놓는 방법을 쓴다.
내가 특히 접어놓기를 잘하는 책은 노자의「도덕경」이라든가 오경웅 박사의「동서의 피안」속에 있는「심적방랑」의 부분이라든가 하는 것들이다. 이런 책들은 공부삼아 읽고있는 것이 아니라 고단하고 어수선한 내 일상의 상심이 이런 책들을 의지하여 수시로 위로받고 있는 것이다.
제르파뇽의「가난한 기도자」중 수많은 페이지를 나는 역시 접어놓고 있다. 마치 하느님과 무릎을 맞대고 앉아 다소곳이 대화를 하는듯한 그 실토들이 간곡하다. 관상의 방법중에는 자연을 매체로 삼는것이 동서양에서 있는 일이다.
그러나 먼지 묻고 피곤한 우리의 생활을 통해 우주적 질서의 본원, 즉 하느님과 마주 앉아서 정담을 나누는 경지야 말로 가장 절실한 지혜요 위안이 아닐수 없다.
그런데 제르파뇽이 이 책의 끝에서 하느님과의 최선의 대화로 판단하고 제시한 내용이 있다. 그것은 바로「주의기도」한편이다. 이 마지막 대목에 접했을 때 나는 감격하여 내 골방에서 방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는 다만 성호를 그을뿐 차라리「주의 기도」마저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절실한 순간의 지속이었다.
▲지금까지 10회에 걸쳐 박복주 수녀가 수고해 주셨습니다. 이번주부터는 문학평론가 구중서씨가 집필해 주시겠습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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