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부는 8월 23일에 긴급조치 1호와 제4호의 해제를 발표했다. 지난 1월 8일에 선포된 제1호는 개헌청원운동을 금지한 것이었고 4월 3일에 선포된 제4호는 이른바 민서학연 사건을 다루기 위한 것이었다.
이 긴급조치 1호와 4호의 동기가 된 사태에 대해서는 가톨릭 교회의 성직자와 신자 중에서도 관련 있는 이들이 있었으며 아직도 재판을 받고 있는 성직자와 신자가 있다.
가톨릭 교회는 일부 성직자와 신자가 이 긴급조치에 관련이 있음을 시인만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재판을 받고 있는 지학순 주교를 비롯하여 고통 받은 모든 형제들을 위한 기도회를 주교단 공동 집전으로 거행했고 지금도 교구별로 여기저기서 같은 의향의 기도회가 열리고 있다.
이러한 사정을 놓고 먼저 생각하게 되는 것은 한국 가톨릭 교회가 언제부터 일처럼 현실에 참여하게 되었으며 또 왜 그래야 했던가 하는 문제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어떤 이는 이 참여의 경향을 가리켜 그리스도가 이스라엘의 민족주의자나 정치가로 행동한 것은 아니지 않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만민의 구원자로 하느님을 대신하여 오신 분과 우리와는 사명이 다르다. 그분은 보편적 진리를 가르치고 행동했으며 우리는 거기에 따라 구체적 실천을 다할 사명을 지고 있다. 이브꽁가르 신부가『교회에도 미흡한 점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상대적인 것은 당대적으로 끝내고 절대적인 것으로써 영원을 향해 밀고 나가야 한다』는 취지로 말한 것이 있거니와 한국 가톨릭의 지난날에도 일시적으로 미흡했던 점이 있었다. 그것은 교회가 사회 현실에 대하여 지나치게 폐쇄적이었던 점이다. 그 때문에 개신교보다 한 세기나 앞서서 땅에 들어왔으면서 오늘날 신자의 수를 보면 개신교의 절반에도 미치지 못한다. 특히 가톨릭은 전교 초기에 무려 만여 명의 순교자를 냈고 개신교는 거의 순교자를 내지 않았는데도 그렇다.
개신교는 종교의 자유가 인정된 후에 이 땅에 들어왔지만 구한말 독립협회 인사들을 협조했고 배재ㆍ이화ㆍ연세를 비롯한 여러 교육기관을 세웠고 3ㆍ1 독립운동 때 가장 많은 수의 민족 대표를 내면서 시위를 주도했다. 이러한 역할들이 개신교로 하여금 한국 기독교의 다수 세력이 되게 한 것이다.
가톨릭은 3ㆍ1운동의 민족 대표 중에 한 명도 가담하지 않았다. 일제의 불의로운 침략에 의해 한국 민족이 의에 굶주리는 박해 받는 백성이 되었을 때 가톨릭 교회는 안일한 자세를 취한 것이다.
그러나 제2차 공직회 이전부터는 역대 교황의 대사회 회칙들이 박해 받는 대중을 옹호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그리고 특히 2차 공의회 후로는 가톨릭 교회의 전통적 사회 구제 원리인 인간 존엄ㆍ양심과의 자유 사회 정의 공동선 등을 모든 지역 사회의 현실 속에 강력히 구현시킬 것이 지시되고 있다.
한국 가톨릭 교회가 하느님의 진리와 정의를 교회의 울타리에 가두어 두지 않고 사회 현실 속에까지 불어넣기 시작한 것은 실로 2차 공의회 이후의 일이며 그 노력이 더욱 본격화된 것은 70년대에 들어서면서부터이다.
71년 4월 총선거 무렵에 김수환 추기경이 공명선거를 촉구한 시국성명, 동년 11월 원주교구에서 불정부패에 항의한 데모, 동년 11월 한국 가톨릭 주교단이「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는 제목으로 발표한 공동교서, 동년 12월 성탄절에 김 추기경이 정부와 여당의 보위법 통과 강행을 가리켜 반공을 빙자한 국민 탄압이 없느냐고 물은 메시지 발표 72년 5월 서울교구가 발행하던「창조」지의 수난사건, 73년 12월 김 추기경이 인권과 민권을 위한 재개헌으로써 삼권분립 및 평화적 정권 교체를 주장한 YMCA 강연, 74년 8월 원주교구의 지학순 주교와 평신자 김지하 시인이 긴급조치 4호 위반으로 군사재판을 받은 일, 때를 같이하여 주교단 공동 집전으로<지학순 주교와 고통 중에 있는 형제들을 위한>기도 미사가 열리고 계속하여 전국 곳곳의 성당에서 기도회가 열리고 있는 현실 등은 근년에 한국 가톨릭이 사회 현실에 얼마나 깊은 관심을 가지고 참여해 왔는가를 잘 말해주고 있다.
그리고 긴급조치 해제 후에도 해결되지 못하고 있는 사건은 특히 지학순 주교가 투옥되어 있는 점이다. 문제의 민청학련 사건은 배후 조종과 자금 지원을 윤보선 김동길 박형규 지학순 김지하 등이 했다고 되어 있다. 그리고 이들은 공산주의자가 아니라고 정부 당국자가 공개적으로 증언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인사들은 사회에서 잘 알려진 대로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하고 추진하려는 열망을 가진 인사들일 뿐이다. 그러므로 긴급조치 1호와 더불어 4호를 해제한 마당에서 진정으로 국민 총화에 보탬을 가져오려면 위 인사들을 필두로 하여 본질적인 선의의 젊은이들과 당국이 사랑으로써 화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그리고 크리스찬으로서 특히 가톨릭 신자로서 이 시대에 임하는 자세는 전방에 신뢰할 만한 군대가 있으니 후방에서는 하느님의 진리에 일치하는 진정한 자유민주주의를 키워야 한다는 일념을 지닐 수밖에 없다. 인간 존엄 언론 자유 사회 정의 공동선 등 자연법적 질서에 입각한 제도, 그리하여 국민의 참정권과 평화적인 정권 교체가 가능한 민주 역량이 생길 때 비로소 총화와 승공도 가능할 수 있게 된다. 우리가 궁극적으로 바라는「주 안의 평화」는 바로 정의의 사회적 현실에서만 올 수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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