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참여」하면 1970년대 유신체제하에서 교회가 치룬 진통을 새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한마디로 그 진통은 교회의 사회참여에 대한 자세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교회가 사회부정을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다는데 대해서는 일치했다. 지금 도 이 문제는 변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결국 원칙적 당위성에는 일치하지만 정의구현의 실천방법에 있어서는 반드시 일치하지 않고 있고, 사실상 일치는 매우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프랑스 잡지의 교훈
1970년경 프랑스 잡지 기사를 읽은 일이 있다. 기사가운데는 당시의 프랑스교회도 한국교회와 비슷한 사회참여문제로 고민하고 있었고, 대부분이 그러한 문제를 다룬 기사들이었다. 역시 사회참여의 문제는 자세 문제였다고 본다.
그래서 사회참여의 유형을 상징적 사진으로 분류하고 유형별로 실시한 설문조사의 결과가 소개되었었다. 지금 그 통계 숫자는 기억하지 못하고 있지만 유형의 세 가지 사진만은 기억하기에 이에 대한 소개를 해보려한다.
유형1:칼빈 총을 멘 예수의 사진
이 예수는 장발(長髮)을 하고 매우 굳은 표정을 하고 있다. 사회 불의를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 표정이다.
이 예수의 생각은 불의를 좋은 말로 타일러야 별 효과가 없다고 본다. 고발도 효과가 없고 그 대신 불의의 원천을 막아야한다고 생각한다. 그 원칙적 악은 비민주적인 정치체제에서 비롯된다고 본다. 따라서 정의구현을 위해서는 비민주적 정치체제와 투쟁해야 되고, 권력구조를 뒤엎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한 투쟁과 전복을 위해서는 힘의 대결이라고 보고 힘의 축적이 필요하다고 본다. 힘의 축적을 위해서는 집단세력을 길러야하고 집단세력의 조성을 위해서는 동조세력의 연대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연대집단의 세력을 가지고 적과 대항하여 물리적으로 굴복할 때까지 강행해야 한다고 본다. 물리적 대결에서 필요하다면 물리적 힘의 사용도 정당화된다고 가르치는 그러한 예수의 상징이다.
얼핏 보기에 속 시원한 행동주의자다. 따라서 이러한 예수 앞에 고발도 행동도 하지 않고 사랑과 자비를 앞세우는 사람은 자기의 제자가 아니라고 본다. 비겁한자 위선자라고 단언한다. 사회적 불의를 막는 길은 힘의 투쟁뿐이라고 강조하는 예수이기 때문이다.
크리스찬이라면 이와 같이 철저한 행동주의의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상징이다. 해방신학 논리에 많이 적용되고 있고, 한국에서도 이러한 논리의 예수를 앞에는 성직자 수도자 평신도가 있다.
이러한 사고를 가진 사람은 독선적이고, 이와 같은 자세에 동조하지 않는 사람에 대해서는 보수주의자로 매도하기도 한다. 이러한 논리를 뒷받침하기 위해서 신ㆍ구약 성서에서 이에 해당되는 성서구절을 교묘하게 뽑아 인용한다. 과연 이런 자세만이 추해야 할 절대적 자세인가 하는 물음을 던진다.
유형 2:까마라 대주교의 사진
남미 레치페 대교구의 교구장인 까마라 대주교 사진이다. 제네바 국제연합회에서 사회정의문제에 대해서 연설하고 있는 사진이다. 탁상에는 여러 개의 마이크가 장치되고 두 팔을 쳐들고 입에 거품을 내며 연설하고 있는 사진이다.
이 까마라 대주교는 비폭력주의자며 탄압과 부정은 강력히 고발해야한다고 하는 정열의 고발주의자로 유명하다. 고발과 병행해서 가진 것을 팔아서 가난한 자에게 나누어 주라고 외치는 부이기도하다. 자기스스로 교구청과 주교관을 팔아 가난한 사람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초라한 집에 거주하는 청빈의 실천자이다.
그래서 이분을 존경하고 따르는 사람들이 많다. 교구장으로서 목자로서의 직무를 유기하고 사회문제에 열중한 나머지 교황청으로부터 사목직에 충실하라는 경고까지 받기도 했다. 한편 교회재산도 팔아서 가난한 사람에게 주라는 주장에 많은 반대도 받고 있는 분이다.
따라서 이분 앞에는 부자가 문제다. 가진 자는 내놓으라는 입장이다. 상류층의 사람들에게는 눈에 가시 같은 분이다. 『먹고 남는 것은 가난한 자의 것이다』라고 외치는 분이기에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인기가 높다. 특히 남미의 착취계급 밑에 시달리는 무사계급에게는 영웅으로 추앙될 수밖에 없다. 찬반의 여론조사를 하면 단연무산계급의 지지도가 높다.
이것도 사회참여 운동의 한 유형이다. 칼빈 총을 멘 예수의 입장에서는 이 자세도 못마땅하다고 할지도 모른다.
유형 3:인도의 마더 데레사 수녀의 초라한 사진
데레사 수녀는 한국에도 두 번이나 다녀갔기에 설명이 필요 없을 줄 안다. 이분은 유고태생으로 특별 소명을 받고 인도의 빈민가에 뛰어들어 굶주리고 병들어 죽어가는 사람들에게 먹을 것과 치료의 사랑을 베푸는 20세기에 살아있는 성녀로 추앙받고 있다.
데레사 수녀는 인도의 사회부정이나 세계 다른 나라의 부정을 고발하거나 행동으로 정면투쟁 하는 일은 생각조차 못하는 분이다. 권력자ㆍ부자를 대항해서 부정을 고발하는 일도 일체하지 않는다. 더군다나 정치체제나 권력구조에 대해서 비판도 하지 않는다.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가난하게 살며, 선의의 사람들의 도움을 받아 침묵 속에 임종자들의 죽음을 돕고 있는 일에만 헌신하고 있을 뿐이다.
데레사 수녀에게는 전 세계 어디에나 반대자가 없다. 이분에게는 종교도 초월해서 모든 이가 존경을 보내고 있다. 이분이 세운 사랑의 선교회라는 수도회는 세계적으로 발전했다.
이분은 외국 선교사를 배척하는 인도에서도 존경을 받고 공산주의 종주국인 소련의 모스코바에도 찾아가 환영을 받고 있다. 이분은 말없이 사랑의 증거로써 세상 사람들에게 감화를 주고 있다. 이분에게는 정치권력도, 백만장자도 미안하고 부끄러운 생각을 갖게 하는 힘이 있다.
우리는 이상 세 가지 유형에서 정의구현의 방법과 자세에 대한 암시를 받을 수 있다고 본다.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유형의 신자들을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세 가지 자세에서 어느 것이 절대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 어느 것이 더 복음적이고 교회적이고 효과적인지는 판단해 낼 수 있다고 본다.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사랑하기 위해서 미워하는 일은 없어야 하겠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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