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리말>
낮과 밤이 회전하면서 온갖 슬픔과 희열이 분산되는 싸늘한 삶의 능선에선「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꿈은 일찍 꾸어보지도 못한채 인간 나 곽상봉이란 이름속에 식어가야 하는지? 처절한 삶 속에 한떨기 가냘픈 숨결을 이 글속에 담기위해…기나긴 세월속의 미룰수없는 운명은 보람된 내일을 위해서 밑거름삼아 더 많은 세월을 누구보다 더 힘차게 밀고 나갈수 있는 힘이 나의 피 속에는 넘쳐흐르고 있습니다. 누구도 막을수 없었던 운명의 불길이 비록 어린 시절의 추억을 짓밟고 갔지만 한가닥 행복했었다는 추억은 어린시절 철모르던 때라고 말하고 싶군요. 지금은 어느곳에선가 흩어진 우리 남매의 행방을 알고 싶어하는 불쌍한 동생들, 주어진 운명을 버리지 못하고 누구의 잘못이냐고 묻고있을 동생들, 나는 이 글속에서나마 밝은태양과 함께 영원히 행복하길 두 손 모아 빌어봅니다. 저 자신의 모든것을 잃어버리고 만 지금 단지 진실된 삶속에서 엇갈린 지난날의 과오를, 또 나의 조그마한 인생 비록 남의 눈치속에서 살아온 근 10년이란 세월, 지금은 후회하며 눈물을 흘려야하는 심정, 모두가 남의 잘못이 아닌 나의 잘못이었다는 것. 난 2년간의 영어(囹圄) 생활속에서 절실히 깨우쳤습니다. 지나간 날을 다시 찾을수 있다면 엇갈린 나의 인생은 지워버리겠지만…많은 오점을 남긴 나의 과거는 이러했습니다.
<추억 1>
추운날씨에도 엄마의 손길을 뿌리치고 추운줄 모르고 뛰어놀던 시절, 함박눈 속에서 마냥 하얀마음을 간직한채 행복도 불행도 나에겐 아무 의미도 주지 않았을때 단지 엄마의 따뜻한 품속에서 어린 난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자랐습니다. 난 어렸을때 울보였습니다. 더듬어보면-
서울 용산구 원효로에 자리잡고 있는 체신학교앞 첩인 어머니의 둘째아들로 태어 났습니다.
6ㆍ25사변 당시 형과 피난처인 아버님의 고향에서 저를 낳아주셨습니다. 그 당시 아버님은 면서기로 계셨고 가정 역시 부호의 외동이셨기 때문에 누구도 말리지 못했습니다.
본처와 아들 한분과 딸 육형제의 아버지였고 또 그 당시 형과 난 성이 달랐습니다. 형은 崔가고 전 郭가라는것, 아버지가 다르기에 성이 달라야 했습니다.
우리집은 다과점을 경영하고 시골서 부쳐오는 양식으로 걱정없이 생활했습니다. 우리 옆집엔 이모댁이 살고있었고 또 외할머님도 계셨습니다. 외할머닌 외손주인 날 퍽이나 귀여워하셨습니다.
천주교 신자이신 할머니는 매일 성당에 다니시며 우리가 잘되길 천주님께 기도드렸을것입니다. 난 할머닐 따라 엄숙한 성당을 따라 다녔으니까요. 그때 나이는 7살이라고 기억됩니다. 나 바로밑에 동생이 4살때이니까요.
아버님이 시골에서 내려오셨어요-일년에 몇번 손가락으로 꼽을만한 아버님의 귀가는 어린 우리들을 반가와서 어쩔줄 모르게 해주었습니다. 그러나 그때 고등학교 다니는 형님은 반가운 표정이 없었습니다. 어릴때지만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밖엔 더 생각할수가 없었습니다.
아버님이 오신 후 우리는 용산 육군본부 앞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곳에선 식당을 경영했는데 좀 장소가 컸다고 생각됩니다. 종업원이 5ㆍ6명되었으니까요. 아버진 시장에서 물건을 사서 나르시고 어머닌 요리사와 함께 일을 하셨습니다. 장사는 잘되었나봐요. 항상 집안은 복잡했으니까요. 그리고 육군 본부가 앞에 있기 때문에 우리집은 항상 군인들이 붐비었습니다. 군인아저씨들은 귀엽다고 부대에서 나오는 건빵을 매일 갖다 주어서 난 입에서 먹을것이 떨어질 날이 없었습니다
그때 우리집엔 식구가 또 하나 늘었습니다. 동생이 하나 생겼어요. 귀엽게 생긴 여동생 모두가 슬픈운명을 타고났다는걸 그땐 몰랐습니다. 모두가 기뻐하기만 했으니까요. 그때 전 국민학교에 입학을 하게되었습니다. 「용산국민학교」집에서 멀지않은 곳이지만 아버님이 데리고 다녔습니다. 멋모르고 단지 나 또래의 아이들이 많은곳이기에 난 마냥 즐거웠습니다. 아무것도 생각할수 없었던 그때의 행복 그때가 정말 행복했었던때입니다. 단지 걱정거리가 있다면 내입속에 먹을 것이 떨어졌을때 그것이 내겐 가장 큰걱정이었습니다.
주방에서 일하고 계시는 어머니, 난 항상 학교에서 돌아오면 엄마의 치마자락을 잡고 보채기 일쑤였고 귀찮아하시는 어머닌 달래도 보고 또 성도 내셨지만 난 지전 한푼을 받지 않으면 절대 엄마곁에서 떨어지지 않다가 한푼 얻으면 구멍가게로 직행하기 바빴습니다. 이곳에서 3년이란 세월을 지냈습니다. 국민학교 3학년이 되었습니다. 난 그 당시 공부는 잘했던 모양입니다. 반장은 못했지만 부반장이란 감투를 섰으니까요. 그때는 학교의 일밖엔 몰랐고 집에 와선 열심히 공부하는 일 외엔 난 항상 집에 있었습니다. 그 당시 우리동네엔 친구들이 별로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그때가 10月이었습니다. 한번도 말썽이 없던 내가 큰 잘못을 저질렀습니다. 동생과 불장난을 하다 이불 한채를 몽땅 태워버리고 말았습니다.
다행히 아무사고는 없었지만 난 아버님께 꾸지람을 듣게되었습니다.
그일이 있은후 한 5일이 지난 어느날 아버님은 할아버지 환갑이 다가와서 우리 식구 전부 시골로 내려간다고 했습니다.
나와 동생들은 기뻤지요 기차를 타고 할아버지 할머니가 계시는 곳에 빨리 가고팠습니다.
이튼날 새벽 집은 외할머니께 맡기고 우린 떠났습니다. 처음 타보는 기차 또 넓은 초원 모든 것이 나에겐 신기하고 아름다왔습니다. 우린 짐이아주 많았습니다.
할아버지의 환갑선물과 가족에게줄 선물이 가방에 가득 3가방이나 가지고 갔으니까요 경부선 열차를 타고 얼마나 달렸는지 내가 한참 자고 일어나도 달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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