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년이 프랑스혁명 2백주년이어서 프랑스에서는 올 한 해 동안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벌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20년 전 1968년 프랑스 전국대학총장회의가 프랑스 북쪽 「깡」 이라는 도시에서 열린 일이 있었다. 프랑스 최고 지성들은 당시 프랑스의 민주주의를 개탄하면서 프랑스혁명 당시 채택했던 자유 평등 박애(LiberteㆍEgaliteㆍFraternite)는 현시점에서 볼 때 잘못된 것이라고 지적했다.
2백년의 경험을 통해서 볼 때 그러한 표어(標語) 는 다른 말로 바꾸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즉 자유 대신에 책임(Responsabilite), 평등 대신에 다양성(Diversite), 박애 대신에 평화공존(Coexistence Pacifique)으로 바꾸어야 한다고 했다. 그 당시는 남의 나라 일이라 별로 그 심각성을 못 느끼고 그저 흥미거리로만 생각했었다. 이제 막상 내 나라의 빗나간 민주화의 현상을 보니 20년 전 프랑스 최고지성들의 주장이 새삼 생각나고 또 수긍되는바 적지 않기에 그 소감을 소개해보려 한다.
자유냐? 책임이냐?
우리는 「민주화」 하면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처럼 자유부터 생각한다. 마치 신조처럼 생각한다. 즉 자유를 절대가치로 생각하고 있다. 프랑스혁명 때에도 같은 생각으로 「자유」 의 표어를 첫째로 채택했었다. 그러나 민주화 2백년의 체험을 한 프랑스 지성들이 「자유」 대신에 「책임」으로 바꾸어야한다고 한 것은 무엇 때문일까? 자유를 쟁취하고 자유를 누려본 결과, 자유 이전에 더 중용한 것은 책임이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었기 때문이다. 자유가 아무리 좋고 소중하지만 책임이 선행된 자유가 아니라면 자유는 자유가 아니기 때문이다. 즉 두개의 자유가 충돌하면 서로의 자유는 상실되게 마련이다. 남의 자유를 침해하지 않기 위해서는 도덕적 책임의식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러한 논리는 상식의 초보에 속하는 것이지만 현실적 행동이 그렇지 못하기에 자유를 말하기 전에 책임을 말하라고 하게 된 것이다.
과연 우리에게 이러한 책임의식이 있는가? 자유만을 요구하면서 책임은 내던진 것은 아니었던가? 그러고도 민주적인 국민이라고 자부하겠는가? 지금까지 그러한 책임있는 행동을 했던가? 그동안 화염병ㆍ돌ㆍ각목이 난무하고 최루탄의 반작용이 따라야 했던 현상은 국민의 자유를 존중했단 말인가? 살인강도ㆍ인식매매ㆍ공해배출ㆍ유해식품ㆍ허위 바겐세일 등은 모두가 책임있는 행위였단 말인가? 그러고도 자유며 민주화란 말을 할 수 있단 말인가?
민주화는 권력구조나 정치제도만의 문제가 아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은 국민의 도덕성과 책임의식의 문제라는 하지 않을 수 없다. 5공 청산만 하면 민주화가 자동적으로 된다고 하니 웃기는 일이 아닐 수 없다. 도덕과 책임의 회복만이 민주화의 지름길임을 알아야 한다.
평등이냐? 다양성이냐?
「민주화」하니까 모두가 동등이라고 한다. 무턱대고 너나 나나 같다라고 생각하는 것이 오늘의 풍조다. 평등사상을 잘못 알아도 크게 잘못이해하고 있다. 동등과 동등하지 않은 것을 구별 못하는 사고에 큰문제가 있다하겠다. 평등이란 모든 사람이 인격과 존엄성에 있어 동등하다는 것이지 책임, 능력, 지위가 동등하다는 것은 결코 아닌 것이다. 인격의 동등성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다른 것(다양성)뿐이다. 부모와 자녀스승과 제자, 사장과 직원이 절대로 동등의 관계일 수는 없다.
그런데 민주화 과정에 있어 스승을 감금ㆍ구타ㆍ삭발하는 행위가 자행되고 있으니 어떻게 평등의 논리로 이를 정당화 할 수 있단 말인가? 인간관계에는 수평(水平)의 질서도 있지만 상하의 질서도 있는 법이다. 이 질서는 예의라는 도덕성에 의해서 수호되어야 하는 법이다. 그런데 오늘의 인간관계는 왜 이렇게 무례하고 살벌하단 말인가? 더군다나 동등의 명분으로 어른도 몰라보는 세상이 되어가고 있으니 한심하다.
민주화는 권위를 배격해야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우월성 자체가 권위를 배격해야 되는 줄로 착각하고 있다. 우월성 자체가 권위인데 왜 배격해야하는가? 무식한자가 유식한자를 보고 유식하지 않다고 해야만 정당하단 말인가? 1등을 보고 1등이 아니라고 해야 옳은가? 우월성 즉 권위는 인정하고 존중해주어야 한다. 다만 우월한자가 우쭐대거나 지배하려든다면 그것이 잘못이다.
권위의 무시는 바로 도전이다. 싸우는 것이 민주화일수는 없다.
그런데 권위를 왜 타도의 대상으로 삼는가? 부모의 권위, 스승의 권위, 장상의 권위를 거부한다면 하느님의 권위, 교회 권위는 어찌 거부하지 않으랴! 그러기에 오도(誤導) 된 민주화에 물든 젊은 새 세대들은 교회를 권위의 시각으로만 보고 비판과 아울러 등을 돌리고 있는 것 아닌가?신앙이란 하느님의 절대적 권위(우월성)를 인정하는 행위다. 따라서 교회는 본질적으로 민주적인 것이 아니다. 하느님의 권위에 근거를 둔 체제이기에 민주적 체제와는 전혀 다른 체제이다. 『너희가 나를 뽑은 것이 아니고 내가 너희를 뽑았다』라고 한 예수님의 선언을 알아야한다.
한편 권위가 거부되면 신뢰가 무너지고, 신뢰가 무너지면 순종이 깨져나간다. 오늘 우리사회나 교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지 않는가? 민주화가 잘못되어도 크게 잘못되어 가고 있는데 아무도 그것을 지적하지 않고 있으니 한심한 일이다.
사랑이냐? 평화공존이냐?
민주화가 오도되었을 때 인간관계는 매우 험악해진다. 사랑이니 박애니 하는 문제는 사기주의에 의해서 고갈되고 만다. 따라서 대립과 갈등만이 남게 된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내세운 것이 「평화공존」의 논리이다. 사랑 따위는 기대하지 말고 서로 침해나 하지 않고 살자는 논리이다. 얼마나 궁한 논리인가? 인간에게서 사랑을 빼버린다면 그것은 죽은 존재, 죽은 사회나 다를 바가 없다.
왜 인간은 서로 사랑해야 하는가? 인류가 형제라고는 하지만 왜 형제란 말인가? 인류공동의 아버지 없이 형제의식이 가능하가? 결국 인류공동의 아버지로서 절대자 하느님을 수용하지 않고서는 서로 사랑해야 할 근거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우리사회가 도덕적으로 정서적으로 메말라 가고 이기주의에 지배되고 있는 것도 그러한 결과임에 틀림없다. 사랑 없는 민주화는 불가능하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