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복자성월을 지내고 있다. 그리고 9월 26일은「한국 순교복자 대축일」이다. 해마다 이 계절이면 우리는 복자찬가를 힘차게 부른다.
『장하다 복자여 주님의 용사여 높으신 영광에 불타는 넋이여. 칼 아래 쓰러져 백골은 없어도 푸르른 그 충절 찬란히 살았네. 무궁화 머리마다 영롱한 복자시여 승리의 빛난 보람 우리에게 주옵소서』
순교자 중에서 복자위에 오른 분은 1백3명이지만 신앙을 위한 위대한 투쟁의 모습을 기록에 상세히 남기지 못한 분들을 포함하여 이조말의 순교자는 1만여 명에 달했다.
한국 역사상 진리와 정의를 위한 신념 때문에 이처럼 많은 사람이 목숨을 바친 일은 없었다. 불교가 처음 이 땅에 들어올 때 異차돈 한 사람이 순교했다. 또 신앙을 위해서는 아니었지만 국통과 임금에 대한 충절을 위해 고려 말의 정몽주와 이조 초의 사육신이 목숨을 바친 일이 있다. 이러한 사례들에 비추어 볼 때 이조 말의 80여년 동안에 천주교 신자 1만여 명이 순교했다는 사실은 한국 역사상의 큰 이변이 아닐 수 없다.
그러면 이 이변은 어떻게 일어나게 되었던가. 거기에는 한국 정신사의 한 혁명적 단계가 동기를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종래의 한국 정신사의 내용이 되어온 종교 및 사상으로는 불교ㆍ도교ㆍ유교 등이 있었다.
이 종교 및 사상들이 지니는 진리는 기독교로서도 존중해야 할 점들이 있다. 그러나 그 진리의 실현 면에서 볼 때 속세를 떠나 은둔하고 포교는 무속과 섞이여 미신에 떨어진 감이 있고 유교는 양반계급의 전유물이 된 경향이 있었다.
이에 비하여 천주교라는 이름으로 이 땅에 전해진 기독교는 대중 사회 안에 자리를 잡고 양반과 상민 남녀 노유를 통일하여 다같이 하느님의 자녀로서 평등하게 존귀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게 했다. 그뿐 아니라 모든 인간은 당대적으로 허무하게 죽는 것이 아니고 하느님 세계의 진리인 본질계에 들어가 영생을 누린다는 희망을 주었다.
그리하여 우리의 선조 순교자들이 얼마나 태연하게 죽음을 맞이했는지 상기해 보면 다음과 같은 예들이 있다.
1839년에 순교한 복자 최경환 프란치스꼬는 시골 마을에 포졸들이 찾아오자 마치 손님을 맞이하듯 했다. 그들에게 음식을 대접하고 남루한 옷을 입은 한 포졸에게 새 옷을 내어 입혔다. 그리고는 마을의 신자들을 찾아다니며 이번 대박해는 어차피 피하기 힘들겠으니 함께 서울로 잡혀가 순교하자고 하였다. 이리하여 최경환의 가족을 포함한 마을 신자 40여명은 마치 무슨 잔치에 나가는 듯한 행렬을 지어 죽음의 형장을 향해 나아갔다.
또한 같은 해 박해 때 순교한 샤스땅 신부가 다음과 같은 편지가 있다.『오늘 즉 9월 6일 순교하기위해 자수하라는 주교의 명령이 도착했습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미사를 드리고 떠나는 걸 기쁘게 생각합니다.「승리의 길은 오직 하나뿐이니 나는 그리스도를 위해 죽기를 원하노라」할 수 있는 것은 얼마나 큰 위안입니까. 이번 박해자인 이 영의정은 우리의 목을 베기 위해 큰 칼 세 자루를 새로 만들게 하였답니다』
오늘의 한국 가톨릭 교회는 이와 같은 순교자들의 피가 씨가 되고 뿌리가 되어 성장하였다.
그런데 현대에 와서 가톨릭의 순교는 그 옛날처럼 신앙의 자유를 위해 즉 교회의 설립을 위해 요청되는 것이 아니다. 오늘날에는 이미 세워진 교회가 그리스도의 가르침에 따른 사명을 수행해 나아가기 위해 새로이 순교가 요청되고 있다. 그 사명은 양심 자유 정의 평화 등 하느님 세계의 자연법적 질서를 실현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꼴베 신부는 나치 치하에서「아우시비츠」수용소에 들어갔다. 그 안에서 꼴베 신부는 가족 걱정을 하는 사형수가 죠프니체크를 대신하여 스스로 아사형을 받았다.
최근에는 브라질에서, 필리핀에서, 베트남에서 가톨릭이 부정부패를 수반한 독재정치에 항거하여 투쟁하고 있다.
우리 한국에서는 71년 11월에 가톨릭 주교단이「오늘의 부조리를 극복하자」는 사목교서를 발표했으며 그 뒤 계속하여 사회정의운동에 주력하고 있다. 그리고 그 사회 정의를 위해 민권운동을 하다가 지학순 주교가 투옥되어 있다. 그는 바오로 6세 교황께 보낸 글에서『이곳(감옥)에 있으면서 저는 가장 미소한 형제들의 벗이 되고 싶었습니다』하였다.
주교의 몸으로서 이렇게 말할 수 있는 자세는 혁명이나 영웅주의보다 기본적으로 더 위대한「사랑」을느끼게 한다. 그리고 사랑은 기쁨 속에서 행해진다. 크리스찬적 사랑과 희생은 괴롭고 우울한 포기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기쁨이며 평화이다.
그리고 일찌기 최경환과 샤스땅 등 복자들이 목에 칼을 받으며 기뻐한 것에 비한다면 오늘날 크리스찬들이 아사형을 받거나 감옥에 가는 것쯤은 별로 비장할 것도 없다.
이 점을 생각하며 우리는 복자성월에 각기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하자. 적어도 안일이나 나태는 버리고 즐거운 마음으로 각기 제 몫의 희생을 하느님께 바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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