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억 2
어딘지도 모르고 아버님 따라 가는 길, 어린 마음이지만 정말 멀었습니다. 우리가 내린 역은 김천역 우린 또 기차에 갈아탔습니다. 외선로인 경북선 다가오는 시골집 어린 가슴에 기대가 컸습니다. 열차가 고향역에 도착한건 어두운 밤. 호롱불 속의 시골을 너무나 어두웠습니다. 캄캄한 밤 길을 더듬어 집에 도착한 우릴 모두 나와 반가이 맞아주었습니다.
그곳엔 두집 가족이 모두 모였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비롯한 큰집 식구, 아버지의 본처인 큰어머니, 첫째딸 순자누나 그때 시집가서 환갑잔치보러 오셨고 둘째 신자누난 미혼으로 집안에 계셨고 세째 문자누나 다음엔 형님이었는데 나와는 어머니가 다른 형제로 김천농고 3학년이었어요. 그 밑에는 순희누나 그 다음엔 나하고는 동갑인데 생일이 빠르다고 누나라고 부르지만 그냥 난 이름을 불렀던 순렬누나이었습니다. 또그 다음은 나보다 2살 작은 여동생 순임이 요것 역시 날보고 오빠라고 부르지 않더군요. 이렇게 해서 큰집의 가족이고요. 다음은 불행의 가족 작은집인 우리집, 마음 착한 어머니를 비롯하여 형님 역시 아버지 다른 형제로 그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최정하) 그 밑엔 나 욕심꾸러기에 울보였고 내 밑에 여동생 영순이 정순이(돼지) 경순이(꼬마)가 갖난아이였어요. 그렇게해서 두집 식구가 전부 17식구 12남매의 대가족이었습니다. 동네에선 손꼽을 만한 부호기 때문에 걱정은 없었어요.
아버님은 아직도 잔칫날이 사흘 남았다고 했습니다. 난 큰집 누나들을 따라 다니며 벼 메뚜기도 잡고 도랑의 가재도 잡으로 다녔습니다. 하루하루가 즐겁기만 했습니다.
두 집안의 귀여움을 독차지한 가운데 잔칫날은 다가왔습니다. 이건 우리집 잔치가 아니라 마을잔치 같았습니다. 온마을 사람과 친지들이 와서 하루 저물도록 집안은 법석이었습니다.
그날이 지나고도 몇밤을 지냈습니다. 난 서울에 가는것을 잊어버리고 아버님 따라서 조상 성묘하러 높은산도 다리 아픈줄 모르고 따라다녔습니다. 큰 집엔 먹을것이 많았습니다. 감과 대추ㆍ밤, 광에 들어가면 가득 쌓여서 먹고 싶으면 항상 마음대로 먹을수 있었습니다.
그 후 시골집에 미련과 아쉬움을 남기고 난 서울 우리집으로 돌아왔습니다. 그때의 추억 정말 마음속 깊이 간직하고싶은 영원한 나의 추억이었습니다.
『지금은 잃어버린 세계… 다시 찾을수 있다면 난 영원히 놓치지 않고 간직하렵니다』
■ 폭풍 1
고향에 갔다온지 6개월이 지난후 우리집은 이사짐을 쌌습니다. 트럭으로 옮겨진 곳은 이태원동, 옛날 사격장이 있는 주변의 초라한 집, 난 아무반항도 못했습니다. 그 후 집안에선 자주 부모의 싸움을 보게 되었고 옆에서 보는 우린 울기만 했습니다. 무슨 이유로 싸우는지 그 후론 난 아버지가 무서웠습니다. 불안정한 생활속에서 그저 학교에 다녔을뿐 집안의 파문과 나의 학업성적 모두가 자꾸 저하되어만 갔습니다. 빈촌의 아이들과 섞여서 난 공부에는 싫증을 느끼고 잊어버리고 말았습니다. 형 역시 직업 없이 놀고 계셨지만 집에 자주 올뿐 밖의 생활을 하셨습니다. 그러던 어느날 집안에 걱정이 생겼습니다. 형이 시내서 불량배와 싸우다 경찰서에 잡혀갔다는소식, 어머닌 걱정하시며 오바와 따뜻한 밥을 갖다주셨습니다.
아버지 역시 말없이 걱정하셨을 겁니다. 남의 손이기에 더 훌륭하게 성장시키기 위해 남몰래 걱정하셨으니라 믿고싶습니다. 부모의 마음 모든것을 다 자식들에게 쥐어줘도 불행만은 부여되지 않길 바라는 맘 그러나 불행한 자식들은 운명의 바퀴에서 돌며 불행속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 후 5일 후에 경찰서에서 나온 형은 얼굴이 형편없이 야위셨습니다. 그땐 전 형에게 정이 안갔어요. 얼마나 무섭게 대하는지 밖에서 놀다가도 형이 부르는 소리엔 난 재빨리 책상앞에 앉아서 보기싫은 책을 봐야만 되었으니까요. 집안이 기울어지면서 내 마음은 공부에 있지않고 노는데 마음이 갔습니다. 할수 없이 공부하면서도 친구들이 부르는 소리가 나면 조바심이 났었습니다. 그런 나의 성적은 결국 꼴찌에서 10등이란 위치를 갖게 해주었습니다.
겨울방학이 가까와졌습니다. 내 마음엔 걱정이 생겼습니다. 보나마나한 성적표를 보이면 그 반응이 무서울 것이란 생각…어머니는 괜찮다 해도 아버지와 형은 몽둥이를 들고 설칠것이니까요. 그렇지만 난 공부하는 것이 싫었습니다 책을 들고 책상앞에 앉으면 하품부터 먼저 나왔습니다. 방학하는날 으레 난 꾸지람을 듣고 책을 봐야 되었습니다.
그런 생활속에 아버님이 고향에서 돈을 마련해와서 우린 또 이사를 하게 되었습니다. 후암동 용산고등학교 앞의 깨끗한 집이었습니다. 그곳에선「영남옥」이란 간판을 걸고 또 식당을 했습니다. 제법 큰 식당이었습니다. 종업원이 5명 또 접대부가 3사람 이었으니까요
또 다시 우리집은 일어섰습니다. 그런데 저의 실력은 더 못했습니다. 방학을 마친후 난 삼광국민학교로 전학되고 또 동생 영순이가 입학을 했습니다. 난 공부도 못하면서 개구장이짓까지 했습니다. 학교의 부서진 책상뚜껑을 계단에 놓고 타고 내려오다 선생님께 벌을 받곤 했으니까요.
그러한 나의 성적은 꼴찌를 다투었습니다. 그런 나의 행복과 성적은 항상 부모님의 근심거리가 되었습니다.
우리 가정의 다난한 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습니다. 모든 기반과 집안의 삶이 닦이고 있을때 이번에는 우리아닌 외인의 손에 우리집은 휴업상태로 들어갔습니다. 4ㆍ19 학생 의거 그 뒤엔 5ㆍ16 군사혁명 짧은 밑천인 우리집은 이제 빚방석에 올라 앉았습니다. 고민하시던 부모님은 모든 것을 청산하고 우린 또 이태원 빈민촌으로 이사했습니다. 다시 찾을수 있었던 행복은 파괴되고 말았습니다.
검은 보리밥이지만 조금 흰곳은 자식 그릇에 퍼놓고 검은누룽지와 물로 배를 채우시던 어머니 밥이 모자라면 친구집에서 한술 얻어먹었다 하시고 자식이 먹는 것을 쳐다보고만 계시던 불쌍한 우리 어머니, 그땐 정말 몰랐습니다. 진정 어머니란 분은 착하고 고마운 분이란 것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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