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의 모든 동물중에서 사람만이 웃을수 있는 이유가 있다. 사람은 고통이 너무 심하여 웃음을 발명하지 않을수 없기 때문이다』니체가 한 말이다. 마찬가지 원리로서 우리는 하루하루의 일상속을 무심히 살아가고 있는 때가 많다. 무심하지 않으면 고통이 심하여 절망하지 않을수 없기 때문일 것이다.
무엇이 그렇게 고통스러운가. 그 이유를 모르며 그 이유를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악천적인 대중, 평범한 사람들이 세계를 뒤덮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이들 중의 많은수는 사회의 부조리에 희생되어 인생 이하의 인생을 살고있기도 하다. 그래도 이들은 매일같이 고통을 심각하게 의식하지 않는다. 그런대로 성의를 다한 하루의 수고, 아내와 자식이 있는 가정, 세월이 흐름에 따라 변화가 있는 생애, 이런것들로 인생의 의미를 느끼고 얼마쯤 또는 충분히 행복하다. 이들도 때로는 예측하지 못한 사고ㆍ질병ㆍ가족의 죽음을 당해 인간의 본질적인 고통을 깨닫지만 곧 체념하고 망각하여 다시 무심해진다.
이들의 이러한 악천성은 간단히 비판되어서는 안될것이다. 대중의 생활 그 자체속에 자연과 같은 생명의 사업, 근로를 통한 창조의 사업, 역사의 정기를 잉태하는 민심이 있기때문이다.
그러면 보다 절실한 고통은 누구의 것인가. 그것은「생각하는 사람」즉 지성인 예술가ㆍ「봉사하는 사람」즉 지도자 성직자들의 것이다. 이들은 선민도 귀족도 아니다. 다만 인간과 세계의 본질에 대해 눈을 떴고 그 때문에 책임지고 수고해야할 소명을 받은 사람들이다.
본질은 정실을 거부한다. 그러므로 소명의 사람들은 자기 인간 존재와 평범한 대중과 세계의 문제를 하나의 문제로 의식하게 된다. 혁명을 몇번씩 거쳐도 변함없이 명동입구 지하도에 얼어붙어 구걸을 하는 남루한 어머니와 아기의 모습이 있다. 28.7%의 북반구, 구미인구가 세계수익의 79%를 차지하고 대다수 저개발국의 사람들은 21%의 소득을 차지한 후 거기에서 다시 지극히 不公平하게 찢어먹는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일까? 아니다. 하느님은 이사야 선지자를 통하여『형제를 못본체 하지말라』하시지 않았는가. 『갈대처럼 머리를 숙이고 베옷을 입고 재를 뒤집어쓰는 것을 주께서 좋아하시는 재계의 날이라고 하느냐. 내 마음에 드는 재계는 이러한 것이 아니다. 억눌린 자를 해방하고 모든 멍에를 풀어주라』(이사야58)하셨다. 이 명령을 재계삼아 지키는 길은 고통의 길이다.
기독교는 고통을 존중한다. 저마다 제 몫의 십자가가 있다고 교회에서는 흔히 말한다. 이 십자가야말로 고통의 상징이다. 그러므로 기독교는 소명의 사람들이 짊어진 본질적인 고통에 일치되는 종교다.
그러나 소명의 사람들이라 해도 역시 인간이므로 허약하다. 제 몫의 십자가를 몸으로 짊어지기가 어렵다. 그 가책을 추가하여 우선 정신적으로라도 이들은 고통을 꾸준히 의식하면서 양심의 횃불이 되어 있어야 할것이다. 소박한 이웃들보다는 덜 무심하게 살아가고 또 일해야 할것이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