종교와 문화는 비슷하면서 서로 다르다. 종교는 무엇보다도 우선 초자연을 목표로 하는 것이며 문화는 무엇보다도 우선 자연을 목표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종교는 초자연을 목표로 하면서도 자연을 떠날 수 없고 오히려 자연을 바탕을 하며 문화는 자연을 목표로 하면서도 초자연을 바라보지 않을 수 없고 오히려 초자연을 위한 준비단계가 되지 않고서는 그 모든 노력과 영화와 위력이 그 뜻을 상실하는 까닭이다. 종교의 궁극적인 열매는 천상에 있고 문화의 궁극적인 열매는 지상의 것이다. 그러나 양자가 서로 한 가닥씩 걸친 과도적인 상태에 있는 것이기 때문에 어느 쪽도 서로 외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종교가 문화에 환원될 수 없고 문화가 종교로 해소되지 못한다.
양자가 제 자리를 차지하는 질서를 더할 수 없이 아름답게 표현한 원리, 즉「초자연은 자연을 파괴하지 않고 오히려 자연을 완성한다.」는 확신은 이 문제에 불변의 광명을 던진다.
만일에 종교 없는 문화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정상 없는 산이나 또는 수평선 없는 바다 같은 것일 것이다. 그러므로 지상의 모든 문화들은 제각기 제 나름대로의 신화나 전설 같은 것을 가지고 있어서 이것으로 정상 또는 수평선을 대신하여 온 것이라고 하겠다. 이런 면에서 볼 때 한국 문화라는 것도 예외일 수는 없겠다.
근대화의 물결이라고 할까 뒤늦게나마 우리들의 고유한 문화, 우리 민족의 주체의식을 강조하는 것은 다행한 일이고 마땅히 해야 할 일이겠으나 그러나 아무리 해도 고립된 개인이 있을 수 없듯이 고립된 문화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한계를 벗어나지는 못한다는 것이 무슨 뜻인가도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유고나 불교사상은 우리의 것이고 그리스도교 는외래의 이질적인 종교라는 통속적인 주장은 너무도 소박한 견해이다. 문화에서「네 것」이니「내 것」이니를 궁극적인 뜻에서 따진다는 것은 뜻 없는 일이다. 차라리 따지려거든 옳고 그른 것을 따져야 할 것이다. 예수를 유데아인이라고 배척한다면 불타는 인도인이고 공자는 중국인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는 유교문화와 불교문화 속에서 살아왔고 또죽어갔다. 우리는 이론이성에있어서나 실천이성에 있어서나 감성에 있어서나 수천 년에 걸쳐서 불교적인 것과 유교적인 것에 젖어왔다. 이것에 의하여 우리 이 희노애락은 지배되어 왔다. 그러므로 이것을 떠나서 한국 문화가 따로 있을 수가 없을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전세기에 있었던 천주교 박해가 결국은 이러한 문화적인 박해였다는 것도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와 동시에 한국 문화에 대한 가톨릭 교회의 과제라는 것도 결국은 유교문화와 불교문화에 대해서 얼마나 영향을 주었는가 하는 문제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사태는 그런 것이 아니라 불교 문화도 유교 문화도 그리스도교 문화도 다 같이 공동의 투쟁 대상과 새로 직면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근대 과학이 모체가 된 현대 세계라는 새로운 형태의 문화 또는 문명이라고 하겠다. 현대의 모든 종교적인 문화 위치는 크게 보면 모두가 공동 운명에 처해 있는 것이다. 이런 뜻에서 보면 우리의 주체도 편협한 것이고 시대착오적인 점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서양 세계를 짧은 시일에 일주하고 돌아온 어느 미국학도가 하는 말이『그네들은 그렇게 잘 살고 있는데 한국에 온 가톨릭 선교사들은 우리들에게 잘 사는 방법은 가르쳐 주지 않고 구도에만 힘 썼다는 것이 야속하게 여겨졌다.』는 것이다. 동양 세계의 불교와 유교도 그러했지만 서양 세계에 있어서도 그리스도교는 중세기의 황금시대에 지나치게 천상의 나라 초자연만을 바라보고 치중해왔기 때문에 지상의 세계에 눈이 어두웠고 함정이 크게 뚫려있는 것을 알아차리지 못했던 것이다. 지금 우리가 당하고 있는 것은 이미 2,3세기 전에 서구 세계에서 그리스도교에 일격을 가한 위력이 동양 세계로 건너와 또 다시 그 위력을 휘두르고 있는 것이다. 서양의 물자를 동양의 정신으로 극복한다는 망상은 시대와 더불어 사라졌을 것이다.
물질적 무기에는 물질적 무기로 정신은 정신으로 상대하여야 한다는 각성이 뒤따르기는 했으나 동시에 그것은 정신과 물질을 분별시키는 비극이 그 속에 도사리고 있었다. 그러나 물질문명이니 과학 기술이니 하는 현대의 왕자는 결코 고립된 것은 아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정신 내부에서 준비되어 왔던 것이다. 우리들이 현대 세계에서 무엇인가를 이룩하고 그것을 영원한 가치에로 연결시키려면 우선 우리도 모체를 찾아서 깊이 자기 내면에로 돌아가 준비하는 태세, 창조하는 태세를 갖추는 것이 최상의 길이 아닐까 한다.
그렇지 못할 때 우리는 언제나 악령의 손끝을 벗어나지 못하는 제물이 될 가능성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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