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이다.
맑은 양광 속에 오곡백과가 탐스럽게 익었다. 몹쓸 수마가 할퀴고 간 상처는 남아 있지만 어김없는 시절을 따라 과일은 향기롭게 곡식은 야물게 영글었다. 사람 사는 세상은 시끄럽고 어수선하여 쟁론쟁투가 끊일 새 없었건만 신은 묵묵히 역사하셔서 이런 놀라운 수확을 마련하시나 보다.
가을이 되면 사람들은 제가 살아온 자취를 되돌아보게 된다. 그래서 혹 옷깃을 바로 여미게도 되고 혹 자괘의 지심에 얼굴을 붉히게도 된다.
『들으라, 씨를 뿌리는 자가 뿌리러 나가서 뿌릴 새 더러는 길가에 떨어지매 새들이 와서 먹어 버렸고 더러는 흙이 얇은 돌밭에 떨어지매 흙이 깊지 아니하므로 곧 싹이 나오나 해가 돋은 후에 타져서 뿌리가 없으므로 말랐고 더러는 가시 떨기에 떨어지매 가시가 자라 기운을 막으므로 결실치 못하였고 더러는 좋은 땅에 떨어지매 자라 무성하여 결실하였으니 삼십 배와 육십 배와 백 배가 되었느니라···들을 귀 있는 자는 들으라』
예수께선 이렇게 말씀하신 적이 있다. 좋은 씨앗을 좋은 땅에 뿌리고 땀 흘려 가꾸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는 가을에 풍성한 결실을 거둘 수 있을 것이다. 반대로 나쁜 땅에 뿌린 것도 없으며 수고조차 하지 않고 허황된 꿈만 꾼 자는 빈 손으로 가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끝없이 슬프고 쓸쓸한 가을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 명확한 진리 앞에 우리는 고개 숙여 자신의 모습을 살피고 자신의 삶을 반성하며 스스로에게 물어보지 않을 수 없다. 진정 자기는 고약한 이기심의 텃터밭에 씨앗을 뿌리지나 않았는가. 증오와 투기와 자만심의 메마른 돌밭 위에 씨앗을 뿌리지나 않았는가. 가시덤불처럼 무성한 부귀영화와 권세, 명성에의 탐심 위에 씨앗을 뿌리지나 않았을까.이 가을에 우리는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제 곧 온갖 초목이 시들어 말라 떨어지고 천지는 얼어붙을 것이다. 회색의 빈 산야 위로 스산한 바람만이 달리는 적막한 계절이 닥칠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고 사람이 사람을 아껴주며 위로해 주는 따뜻한 마음이 한결 소중해지는 계절이 다가온다. 사람이 그 온유한 마음을 잃고 포악해진다면 더욱 춥고 삭막하여 견디기가 어려운 것이다 . 그러나 사랑으로 충만한 마음으로 손과 손을 맞잡는다면 모든 고난을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우리가 무슨 일을 하여야 의로운 일이 될까. 어떤 일을 하여야 인류의 전진에 의한 작은 보탬이 될까. 그리스도의 지체로서 맡은 바 기능을 다 완수케 되는 일은 어떤 것인가… 생각 있는 자는 긴긴 가을 밤을 시름으로 지새우게 될 것이다.무심히 우는 가을 벌레 소리조차도 들을 귀 있는 자의 귀에는 의미롭게 들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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