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주교 체제
민주화의 물결을 타고 교회 안에서도 교회의 민주화론이 일기 시작해서 점점 이런 생각들이 확산되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시대가 민주화의 시대인데 교회라고 별수 있느냐? 시대 속에 존재하는 교회도 시대의 흐름에 발맞추어 민주화를 이룩해야지 구태의연하게 비민주적이고 권위주의적인 자세에 안주하려고 한다면 교회는 스스로 사회에서 고립되고 따라서 쇠퇴하고 말 것이 아니하는 생각들이다.
그래서 오늘의 교회가 현실에 대하여 능동적이고 미래지향적인 위상(位相)을 가지려면 교회도 빨리 민주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우 설득력 있는 논리처럼 보인다. 이러한 논리는 민주화에 민감한 젊은층이나 신진지식층 또는 사회참여에 심취된 신자들에게는 아무런 반성이나 여과(濾過)도 없이 그대로 수용하기가 쉬울 것이다.
일단 이러한 논리에 의식화되면 교회 민주화론을 정당화ㆍ적극화하려 한다. 그러한 주장의 동기는 교회를 위하고 복음적 사명을 보다 효과적으로 달성하기 위해서라고 강조한다. 따라서 교회 민주화를 위해서 그런 사람들은 의식화 운동과 조직을 열성적으로 펴나가면서 한편 교회당국에는 진정서, 건의서등을 내지 않고는 참을 수 없게 된다. 그러다가 진정이나 건의에 별 반응이 없고 보면 이제는 독자적인 행동을 취하면서 다양한 성명서들이 교회내외로 뿌려지기도 한다. 이쯤 되면 교회전통이나 교회원칙이나 교도권의 권위 같은 것은 그렇게 중요시 되지 않는다.
이러한 교회민주화 논리는 궁극적으로 교회체제론에 부딪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즉 교회민주화는 정치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그대로 적용해야 된다는 것이다.
주권재민(主權在民)의 원리를 그대로 원용하여 교회권리는 하느님 백성인 신자들(성직자 수도자 평신도)에게 있고 교회운영과 방법도 신자들에 의해서 결정되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하려는 것이다. 극단적으로 말한다면 기존 교회체제에 대한 도전으로까지 이어질 수 있는 것이다.
사실 이와 같은 현상이 일부에서는 드러나 있기에 정통교회의 입장에서 볼 때 우려를 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이러한 현상의 원인을 진단한다면 대략 3가지로 요약될 수 있을 것 같다. 첫째는 가톨릭교회의 본질이 무엇인지 잘 모른다는 것이다(그것은 교리지식의 빈곤이나 신앙의 연륜(年輪)이 짧거나 신앙의 뿌리가 깊지 못할 때 그렇다). 둘째는 신앙적 순종에 대한 영성의 빈곤이다. 셋째는 현세가치에 대한 지나친 집착 등을 지적할 수 있다.
비민주 체제
가톨릭교회를 민주체제로 전환해야 한다면「신자들에 의한 신자들을 위한 교회」라는 정의가 성립된다. 그러나 가톨릭 정통교리에 따르려면「하느님에 의한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한 교회」임을 받아들여야 한다. 교회의 존재근거는 하느님 백성이 아니고 바로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예수님 자신의 선언을 들어보자.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라, 내가 너희를 택하여 내세운 것이다』(요한15, 16). 『너희 열둘은 내가 뽑은 사람들이 아니냐?』(요한6, 70).
『너는 베드로이다. 내가 이 반석위에 내 교회를 세울 터이다』(마태16, 18). 이러한 하느님의 권위에 의해 세워진 교회체제, 즉 「신적 제도」를 어느 누가 바꾸겠다고 생각할 수 있는가? 아무리 사회정치 제도가 민주체제라 하더라도 교회체제는 이와는 근본적으로 성격을 달리하고 있음을 명백히 알아야 하겠다.
권위의 교회
민주화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현상은 권위에 대한 거부다. 권위는 무조건 싫다는 감정으로 팽배해가고 있는 것이 오늘의 현실이다. 따라서 권위나 권위주의는 민주제도를 위한 타도의 대상으로서 이를 의식화 해나가고 있다. 상위에 있는 자가 하위에 있는 자를 지배해왔기에 평등한 민주사회에서는 지배나 지배주의가 용납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지배관계에 의한 권위나 권위주의라면 교회도 단연코 배격한다. 그러나 권위 그 자체는 지배개념과는 별개의 것임을 알아야한다. 권위는 바로 우월성(優越性)자체인 것이다.
능력ㆍ책임ㆍ지위ㆍ공적 등 우월할 것을 우월하다고 인정하는 것이 권위이며 따라서 이러한 권위는 존중되어야 하며, 그렇게 존중해야 한다고 가르치고 주장하는 것이 권위주의라면 그것을 배격할 이유는 있을 수 없다.
오늘날 민주화 과정에서 이러한 식별을 하지 못하고 지난날 지배받았다는 사실만으로 반작용으로 권위를 타도하려 한다면 오늘의 민주화는 자연에 역행하는 민주화가 될 것이다. 부모에게 효도, 스승에게 존경, 노인과 상급자에게 마땅한 예를 갖추어야 한다는 것은 그들의 우월성(권위)을 인정하는 인간의 도리이기 때문이다.
우수한 사람에게 상장ㆍ상패ㆍ상금을 주는 것은 그 우월성을 인정하는 정당한 행위다.
문제는 우월한 자가 우월하지 못한 사람을 지배 또는 억압한다면 그것은 잘못이고 그것은 막아야한다. 가톨릭교회는 하느님의 권위를 존중하는 교회이다. 하느님은 절대적으로 우월하신 분으로 받들어져야 한다. 즉 그 우월성을 인정하는 것이 신앙인의 기본자세이다.
따라서 교회의 권위는 하느님의 권위의 표현이고 교회는 하느님의 이름과 권위로 교회 행위를 하고 있는 것이다. 비록 교계제도에 속하는 성직자는 동등한 인간이지만 그들이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교회직무를 수행하기 때문에 그들의 권위는 존중되는 것이다. 인간적으로 우월하기 때문에 권위가 존중되어야 한다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이러한 하느님의 권위와 교회권위를 오늘날 권위거부 풍토에 휩쓸려 이 권위를 지배개념으로 착각한다면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만일 그렇게 권위를 거부한다면 하느님도 교회도 거부하는 결과에 귀착될 수밖에 없다. 오늘날 그러한 현상을 일부에서나마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다시 한 번 아브라함의 신앙이 어떤 것이었는지, 권위와 순종의 영성적 가치가 어떤 것이었는지 다시 알아보고 말해야 하겠다. 교회는 죄인들이 모인 교회이나 그 자체는 하나이고 거룩하고 공번되고 사도로부터 이어오는 교회라는 것을 새롭게 인식하고 교회를 아끼고 수호하는 책임을 다함께 느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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