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주일에 두 번 미국인들에게 우리말을 가르치는「파트저브」를 가지고 있다. 언어 체계가 틀리고 사고방식이 판이한 그들에게 읽기도 까다로운 우리말을 가르치노라니 자연 짜증이 치밀어올 때가 많다. 나도 모르게 어느날 『죽겠군』소리를 내뱉은 적이 있었다.
귀가 예민한 M군. 이 말이 끝나자마자 질문이 있다고 하였다. 왜 한국인들은 하루에도 수 차례씩『죽겠습니다』소리를 연발하느냐는 것이 그의 질문 요지였다. 한국인 여성과 결혼하였다는 M군. 항상 휘파람 섞인 유행가를 읊조리며 낙천적으로 미래를 바라보는 M군. 땅콩과자를 바스락대며 먹기를 좋아하고 태권도 흑띠 매는 것이 가장 커다한 소원인 M군. 그로서는 아마 아내로부터 가끔 심심찮게 들어오는 이 음울하고 가라앉은 말의 뉘앙스를 제대로 파악하는 것이 힘들 것 같다.
조락의 계절이 오고 새들이 새로운 남방을 향해 이동하는 11월이 오고 어쩐지 두려워지는 12월의 달력이 마지막 한 잎처럼 카렌다 걸이에 달려 있는 걸 보면 생활에 쫓기던 나날에 대한 일말의 반성이 그리고 지나간 일 년에 대한 후회와 성찰의 욕구가 솟아오른다. 범속한 자들이나 빼어난 인물들이나 누구나 느낄 가장 평범한 인간의 감정이다.
누구라 특별히 한 해를 잘 보냈다고 장담할 사람은 드물 것이다. 나조차 한 해를 버러지처럼 헛되이 보내지는 않았더냐고 채찍질해 본다. 이 채찍은 내게서 떠나 허공에서 매서운 소리를 마치 비명과도 같은 처절한 소리를 낸다. 그래 나는 하나의 은유 하나의 상징을 이 소리 중에서 느낀다. 본다.『죽겠습니다』라고 뇌이는 아득한 소리들을 듣는다.
올해는 내게 있어서 정말 우여곡절이 별처럼 많은 해였다. 사랑한다고 믿은 사람의 실체를 사랑한 것이 아니라 내가 쌓아놓은 형자를 사랑했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결별을 단행했었으며 힘들게 대학원 과정을 끝냈고 많은 우인들을 이념의 변화나 환경의 변화 때문에 잃어버린 해였다. 이런 실과 득은 인간들한테만 한정된 것이 아니었다. 악이 선보다 우월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고 정의보다는 불의가 진실보다는 허위와 거짓이 그리고 순수보다는 비순수가 판치는 것을 목격한 해였다.
존경하는 분들이 보여준 추한 인간의 본능적인 모습들 자기 희생과 고화보다는 즉물적 사고방식에 얽매여 야욕과 물욕에 눈이 뒤집힌 수많은 사람들의 모습. 이런 세상의 표정들이 나를 경악토록 만든 해였다. 내가 지니고 있던 많은 가치가 전환되고 보다 더럽고 다양한 세계를 얻어 듣고 대신 순수와 정열을 잃은 해였다.
자신의 눈동자에서 맑은 정기가 가셔지는 것을 씁쓸히 응시하며 허공에서 나와 사회와 세계에게 내려 던져지는 매서운 반성의 채찍이 바로「죽겠습니다」의 또 다른 표현임을 깨닫는다.
이 한 해는 서글픈 한 해였다.
정말이지 나는『바람이 인다. 살도록 해야 한다』는 시인의 말을 되새겨본다. M군을 향해 나는 호전된 인간 관계와 애정과 신뢰와 정의의 재생을 믿으며 내년에는『좋습니다』라고 웃어보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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