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탄과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좋은 말과 이론이 쏟아져 나오기 때문에 별로 놀랄 일은 아니었지만 이번에도 교회와 사회의 뜻있는 분들에 의해서 푸짐하고 거창한 말이 전달되었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한다, 인간 회복이 시급하다, 사회 정의를 구현시키는 데 용감하게 해야 한다 등등 대단히 좋은 주장들이다.
여기서 필자는 사회 복지와 하느님 나라의 발전에 관심이 많은 분들의 이와 같은 말씀을 함부로 비판하려는 뜻은 없다. 다만 거창한 이론과 주장이 효과적인 방법에까지 연장되어 행동화해야만 한다는 것을 지적하려는 것이다. 행동에까지 옮기지 못하는 이유를 간단히 피력하려는 것이다. 항상 같은 말만 반복하고 실천에 옮기지 못함은 한심스럽기만 하다.
거창한 말이나 이론을 반복하다 보면 다람쥐 쳇바퀴 도는 식의 제자리 걸음에 비길 수 있게 된다고 본다.
지금 우리 사회와 교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지도자들이 실천과 표양을 앞세우고 정신 개조와 계몽운동을 해야 하는 시기가 찾아왔다고 보는 것이다. 바른손이 하는 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 (교만을 경계함)고 하신 말씀도 유의해야 하겠지만 지도자들의 말과 행동이 일치해야 한다는 기본 상식도 망각할 수는 없지 않은가?
부정부패는 빈부의 차이를 초래했다. 그러므로 부정을 해소하는 방법은 가난한 이웃을 도와 주는 길이다. (가능하면 자립하기 위해서) 크리스챤은 사랑의 계명을 준수하기 위해서도 가난한 이웃을 예수님과 같이 보고 힘껏 도와 주어야 한다. 이상과 같은 도리와 말은 너무나 자주 들은 말이다. 이제는 좋은 말이 성당에서 듣는 형식과 같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러면 무엇이 부족한가? 이론은 좋지만 실천 방법이 모호하다는 점이다. 교회에서 지난 번 성탄을 지내면서도 부정을 몰아내고 애덕을 실천하며 가난한 이웃을 도와 주자는 설교나 강연은 많이 했다. 그러나 어떻게 애덕을 실천하고 가난한 이웃을 도울 수 있겠느냐 하는 방법은 제시하지 못했다고 본다. 이웃을 사랑하고 나라를 사랑하자는 주장이 실천에까지 연장되지 못하였음은 결국 사랑이 부족한 탓이 아니겠는가? 참 사랑이 있는 설교가는 실천이 뒤따르게 될 것이며 다른 사람들이 실천할 수 있는 본보기와 방법까지도 제시하게 될 것이다. 가난한 사람을 도와 주어야 한다고 외치는 교회가(성직자와 평신도) 실천하지 않는다면 계명 중에 가장 큰 계명을 무시하는 잘못을 저지르고 있지 않는가? 지도자들이 먼저 실천함으로써만 사회 정의의 구현은 가능하다. 빈부의 차이를 초래하는 부정부패를 일소해야 한다고 주창하는 주교님들과 신부님들이 먼저 가난한 사람들을 도와 주기 위해서 속죄금을 냈어야만 하지 않았는가? 주교님은 얼마(능력과 성의에 따라서), 신부님은 얼마를 내놓고 설교를 했더라면 정의의 구현이 가능한 것으로 전달되었을 것이다. 선행을 부르짖는 분들이 먼저 실천하지 않으면 그 설교와 주장은 기념행사와 같은 격이 되기가 일쑤다. 아무리 좋은 강론을 하면 무슨 효과가 있겠는가? 얼마 전에 굶주리지 않는 사람들이 수입에서 100분의 1을 바쳐 주면 굶주리는 20억의 인구가 식생활을 해결한다는 좋은 이론을 말한 적이 있다.
그때 교회의 지도자들이(교황님, 주교님…) 먼저 생활비에서 100분의 1을 바치면서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했더라면 많은 신자들이 협조했을 것이며 따라서 좋은 이론이 수포로 돌아가지는 않았을 것이다. 결국 사랑이 부족한 데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지 않았는가?
부정부패의 일소운동과 빈부의 차이를 없이하는 운동은 남의 잘못을 지적하고 규탄하는 방법도 있을 것이다.
남을 보고 기도하고 정직하게 행동하라고 설교하는 방법도 있다고 본다. 그러나 적극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내가(특히 지도자들) 먼저 실천하고 남들에게도 실천하는 길을 가르쳐 주는 방법이다. 지도층의 인사들이 모여서 하는 탁상공론으로는 효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다. 그런 공론과 설교를 듣는 사람들이 실천에까지 옮기지 못할 것이다. 고양이의 목에 방울을 달자는 공의회에서 방울을 달자고 제안한 쥐가 한 발자국이라도 고양이에게 가까이 가면서 말을 했더라면 다른 쥐들의 반응이 좋지 않았을까.
인간 행위에 있어서 이론과 정신이 필요함은 사실이다. 그러나 실천이 없는 이론을 말하는 지도자들은 무능하다. 우리 사회 복지를 위해서 부정을 일소하고 빈부의 차이를 없이하려면 지도자들이 먼저 실천하며 현실적 방법을 제시해야 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그 어느 때보다도 이론과 형식에 불신을 품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회와 교회의 교육이 큰 결함이 아닐 수 없다. 그러므로 사회와 교회를 위해서 진정으로 걱정하고 관심을 갖는 분들이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고 실천해야만 효과를 거두며 장래를 위한 일꾼의 구실을 할 수 있을 것이다.『교회는 가난한 이를 도와 주어야 할 의무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살인자와 같다』고 하는 주교님과 신부님들의 강론 말씀은 같은 주교님과 신부님들이 구체적으로 얼마얼마를 희생하여 가난한 이웃을 도와 주어야만 효과가 있을 것이다. 또 다른 방법이 있겠는가? 다른 방법으로 빈부의 차이가 해결될 수 있다고 보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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