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성탄 때 판공성사를 보고 나서 나는 문단의 한 친구를 만났다. 그때 나는 내 마음의 평화를 드러내는 이야기를 해 주었다. 그 친구는 농담이기는 하지만 신랄한 우려로써 내게 대답했다. 가뜩이나 온건한 성격인데 신앙생활에 깊이 빠져들어가면 앞으로 무슨 일을 할 수 있겠느냐, 자기 혼자 천당 갈 차표를 끊어 놓았다고 마음 느긋해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실제로는 내가 천당에 갈 차표를 끊어놓은 처지도 못 된다. 나이 어린 학생 시절에 견진성사를 받아서 감히 그리스도를 증언할 용사라는 인호가 내 영혼에 찍혔다고는 하지만 나는 오랜 기간에 걸친 탕아의 경력을 지니고 있다.
그 방탕의 시절에 나는 판잣집 골목의 주석에 깃을 치고 앉아 언필칭 역사의식이니 장황의식이니 민중의 대지니 하는 어휘들을 들먹이며 어두운 허공에다 대고 삿대질을 했다.
그러다가 내 옷깃에 얻어 붙인 레테르는 이른바「참여파 평객」이다.
정신작업에 있어서는 본질적으로 불순한 타성에 대해 저항하고 새로운 진실을 창조해 나아가는 길이 있을 뿐 참여니 순수니 하는 것이 따로 없는 것이건만 피상적 분파주의자들이 그렇게 구별하였다.
그러나 일견 살벌해 보이는 그「참여파」라는 지칭에 대하여 나는 굳이 기피하고 싶은 심사가 없었다.『한 명의 여자를 제대로 사랑하기도 힘드는 것이 인간인데 하물며 민중을 사랑한다는 참여파의 정신이야말로「위선」이라고 어느 순수파의 인물이 공언했을 때 나는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아! 과연 그럴 듯하다. 그러나 정말로 그럴까. 그럴 수가 있을까. 그렇다면 인간도 동물이나 다를 것이 없지 않은가. 문화니 사상이니 종교니 하는 것도 있을 필요가 없지 않은가. 순간적으로 나는 다시 반발하기 시작했다.
일언이폐지하고 나는 내가 살고 있는 이 사회가 민주적으로 발전하지 못하고 오히려 퇴보하고 있다는 사실, 그리하여 인간 존엄의 정신과 생활 환경의 向上이 저지 당하고 있다는 사실, 그 속에서 나도 피해 받는 한 인간이라는 연대의식이 발동했다.
퍼브릭 서번트 즉 민중의 심부름꾼에 지나지 않는 신분의 사람들이 민중 위에 올라서서 벼슬아치의 교만을 키워 가고 있는 사회. 내 방탕의 발길이 거니는 황량한 마을의 언덕마다 무수히 들어선 교회의 첨탑들 저 교회들은 자기 혼자 천당 갈 차표를 끊는 사람들의 대합실인가.
우리의 사회가 이렇게 썩어 가는데 누가 이 사회의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줄 것인가?
내 근육 속에도 반역의 검은 피가 들끊어 올랐다.
이 반역의 피 때문에 지금도 내 마음에 장시간의 평화가 정착하지를 못한다. 그러니 아직 천당 갈 차표를 끊을 자격이 없다.
그러나 요즘 애써서 마음을 가라앉히고, 먼저 나 자신의 인격부터 건강하게 치유되기를 기구한다. 다행히 근래에는 제2차「바티깐」공의회 문헌 중「현대 세계의 사목 헌장」을 탐독하게 되었다.
『극복되어야 할 개인주의적 윤리관, 개인과 인간 사회의 상호 의존성 만인을 위한 현세 재화, 만민의 본질적 평등과 사회 정의, 책임과 사회 참여, 공동선의 촉진…』등 신앙의 양심과 사회 과학적 리성을 동시에 충족시키는 더없이 훌륭하고 풍부한 지혜를 그 속에서 발견하게 된다.
이 지혜의 지표에 따른다면 참여파로서의 내 정신작업에도 혼란이 생기지 않을 것 같고, 내가 종사하는 언론의 일에서도 신념이 설 것 같다.
그리고 더욱이는 제2차 공의회의 뜻에 따라 한국 가톨릭교회가 사회 주의를 위해 노력하고 있는 점에 존경을 보내게 되며, 교회의 진실된 사명에 대해 앞으로 더욱 큰 기대를 갖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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