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이 흐른 지금, 이 글은 쓰면서도 저의 가슴은 찢어지는것만 같습니다.
가난의 슬픔 난 깨달았습니다. 그렇지만 그땐 난 어렸습니다.
우리들은 인생이란걸 알기엔 너무 어린 아이었습니다. 난 그때 역시 어머니의 눈물을 보고도 정신을 못차렸습니다. 집이야 가난하던 말던 밖에서 친구들과 놀기가 바빴고 학교가는 것도 게을러졌습니다. 한달에 반은 학교에 가고 반은 동네의 친구들과 책가방을 옆에끼고 남산으로 돌아다니며 놀다 파학시간이 되면 의젓하게 학교 갔다 왔느니 하고 어머니께 인사를 했었습니다.
어느날 어머니께 학교 간다고 나왔습니다. 남산에 올라가서 친구들을 찾아보았지만 없었습니다. 혼자 다니자니 책가방이 걸렸습니다. 난 바위틈에다 책가방을 안보이게 감추어놓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 파학할 시간이 되어서 책가방있는 곳으로 갔습니다. 가보니 웬걸 있어야 할 가방이 없었습니다. 아차 싶은 마음, 이리저리 찾아보아도 책가방은 없었습니다.
머리에 떠오르는 후회의 불길 형에게 혼날 생각을하니 걱정이 되었습니다. 집에도 못 들어가고 집주위만 빙빙 돌았습니다. 아무리 후회를 해보았던들 잃어버린 가방은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집에선 저녁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는 나를 걱정하시다 학교에 전화를 하셨습니다. 우리집 옆 약방에서 전화거시는 어머니의 모습, 아차 탄로났구나 하는 맘!그러나 어떻게 해야하는지 좁은 나의 머리는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멀리서 나를 찾아다니시는 어머니가 먼 빛에서나마 보였습니다.
자정이 가까왔습니다. 난 배도 고프고 또 쏟아지는 졸음속에서 내 잠잘 곳을 찾아야 했습니다. 그리하여 조바심속에 두리번거리며 찾은 곳 그건 우리 뒷집의 비까루공장 창고안. 비짜루 틈새에 쪼그리고 앉아 잠을 청해보았지만 다음에 전개될 일이 궁금하고 불안해서 영 잠이 오지 않았습니다.
다음날 아침 눈을 떠보니 창고가 아니라 우리집 방안이었습니다. 모두들 아무 소리 없었습니다. 결국 난 사실대로 말하고 그날은 책가방이 없어 학교에 못하고 집에 있었습니다. 그러나 헌 책을 사다 주신 형의 배려로 이튿날부터 난 또 꾸준히 학교에 다녀야 했습니다.
공부는 하기싫지만 내 옆에는 그때부터 호위병이 따랐습니다. 우리집 주인의 딸 그 애는 3학년으로 내가 교실에 들어가면 그애도 자기교실로 갔습니다. 하기싫은 공부, 그러나 자신있는 과목은 음악, 그냥 노래를 잘 불렀나 봅니다. 당시 중앙방송 어린이 노래자랑에 나서 상도 타오고 했으니까요. 어머니가 가르쳐준 봉선화, 마치 엄마는 꼭 봉선화 같았습니다. 곱던 얼굴은 가난과 고생으로 주름살 져 가고 봉선화를 부르는 엄마 눈엔 미래를 예측하는양 눈물이 맺혀있곤 했습니다.
지금도 한번 내 입에서 흘러나오면 나의 눈에서 눈물이 흐른답니다. 한번 편히 쉬어보시지 못하고…지금은 먼곳으로 가셨지만 그땐 우리에게 없어서는 안될 불쌍한 우리 어머니였습니다.
고향에 간지 여섯달이 넘어도 돌아 오시지않는 아버지, 우리의 생활은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손님이 없고 밑천이 없는장사 견디다 못한 어머닌 빵장사를 치우고 비짜루 행상으로 나가셨습니다.
당시 우리 가정의 생계 유지는 오직 어머님과 형님의 손에 달려있었습니다. 형은 쌀집 점원으로 엄마는 무거운 비짜루 행상에서번 많지않은 돈으로 우린 아침은 보리밥, 점심은 없고 저녁은 수제비나 빵으로 연명해 나갔습니다.
학교에서의 점심시간 난 운동장에 나가 놀아야만 했고 배고픔을 참으며 파학할 때를 기다렸습니다. 공부를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나, 먹을것을 찾아 찬장과 솥뚜껑을 열면 솥안엔 어제먹던 빵이 있었고 그 빵을 난 동생들과 나누어 먹었습니다.
장사하러 나가시다 자식들의 배고픔을 덜어주기위해 먹으라고 두고가신 밥 우리는 맛있게 먹었습니다. 해질때가 되어 동생들과 어머니가 오시는 길목에서 노을을 바라보며 기다리면 지친 어머니의 발걸음, 그래도 자식들의 저녁을 해주기 위해서 쌀과 보리쌀, 그리고 한손엔 꽁치 서너마리, 밥을해서 밥상에 앉으면 어머니의 그릇엔 검은누룽지와 우리가 먹고남긴 꽁치 대가리가 있을뿐.
그런 불쌍한 어머니를 저버린 불효자식, 눈물로 사과하고 있습니다.
겨울이 왔습니다. 기다려도 오시지 않는 아버지를 찾아서 기차에 몸을 실었습니다. 다시 타는 고향 열차, 어린 우리들은 마냥 기쁘기만 했습니다. 그곳에 가면 먹을것 많고 또 아버지도 계신다는 어머니의 말씀, 그러나 그러는 엄마의 눈엔 눈물이 방울방울 흘러내렸습니다. 엇갈린 인생과 험란한 인생항로, 가난의 설움과 우리의 장래를 생각하셨을 것입니다.
이튿날 새벽 우리는 고향마을 입구에 도착했습니다. 이곳 저곳에서 마을사람들이 반가이 맞아주었습니다. 집에 도착한 우리 가족, 전번과는 다른 대우를 받았습니다.
「싸늘한 눈치」그러나 난 그런걸 모르고 큰방과 아랫방을 뛰어다녔고 어머닌 부엌에서 큰집의 일을 거들었습니다.
참! 아버진 집에 없었습니다. 부산에 계신다는 말을 할머니에게 들었습니다. 할머니는 작은집인 우리들을 더좋아하시며 내 주머니에는 항상 먹을 것이 안떨어졌지만 3일이 지난 새벽이었습니다. 어머니가 계시지 않았습니다. 그 전날 큰어머니와 싸우시던걸 봤는데 난 어린마음에 우릴 버리고 멀리 딴곳에 가신줄만 알고 막 울었습니다. 동네를 동생들을 데리고 찾아봐도 마을안에 계시지 않고 어머니가 없어진 후 원래 우릴 안좋게 보던 눈치가 표면화되었고 우리가 울면 할아버지와 큰어머닌 막 야단을 쳤습니다. 난 그런 생활이 너무나 싫었습니다. 굶더라도 어머니와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가장 많이 본 기사
기획연재물
- 길 위의 목자 양업, 다시 부치는 편지최양업 신부가 생전에 쓴 각종 서한을 중심으로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과 사목 현장에서 겪은 사건들과 관련 성지를 돌아본다.
- 다시 돌아가도 이 길을한국교회 원로 주교들이 풀어가는 삶과 신앙 이야기
- 김도현 신부의 과학으로 하느님 알기양자물리학, 빅뱅 우주론, 네트워크 과학 등 현대 과학의 핵심 내용을 적용해 신앙을 이야기.
- 정희완 신부의 신학서원어렵게만 느껴지는 신학을 가톨릭문화와 신학연구소 소장 정희완 신부가 쉽게 풀이
- 우리 곁의 교회 박물관 산책서울대교구 성미술 담당 정웅모 에밀리오 신부가 전국 각 교구의 박물관을 직접 찾아가 깊이 잇는 글과 다양한 사진으로 전하는 이야기
- 전례와 상식으로 풀어보는 교회음악성 베네딕도 수도회 왜관수도원의 교회음악 전문가 이장규 아타나시오 신부와 교회음악의 세계로 들어가 봅니다.
- 홍성남 신부의 톡 쏘는 영성명쾌하고 논리적인 글을 통해 올바른 신앙생활에 도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