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년 1월 18일부터 25일까지의 1주간은 교회 일치를 위한 기도주간이다. 그런데 금년 들어서는 주목할 만한 기도주간의 행사라고는 23일 서울 명동성당에서 갖게 되는 기도회밖에 없는 것 같다. 아직도 교회 일치의 완성이 요원함에도 불구하고 일치를 위한 기도가 감소일로에 있다는 것은 그만큼 교회 일치에 대한 관심이 줄어들었다는 것을 뜻하지 않는가 생각되며 신ㆍ구교를 막론하고 한국에서는 교회일치운동을 한 번이라도 제대로 실천해본 적이 있는가 의심도 된다. 말하자면 우리는 진심으로 교회 일치의 필요성을 느끼고 원하고 있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면 먼저 1971년 한 해 동안에 국제적으로나 국내적으로 교회일치운동의 경과를 살펴보자.
국제적으로는 북아일란드의 전쟁이 교회 일치에 흑막을 던진 것은 사실이다. 국가의 이해관계가 종교적 이념보다 더 긴박하고 강력하다는 것을 우리는 느낄 수 있었다. 그러나 북아일란들의 전쟁을 종교전쟁으로 본다는 것은 속단일지 모른다. 왜냐하면 중세기와는 달리 종교의 이해관계를 위해 전쟁한다는 것을 현대인은 생각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영국 하원의원이며 북아일란드 가톨릭 봉기의 지도자인 아일란드 사회주의자 벨나멧트 데브린 양이 말한 바와 같이『북아일란드에서의 계속적인 불안과 반란은 종교적 적의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 착취가 원인』이 되는 것이다. 1971년에 교회 일치에 있어 흑막만이 있었던 것은 아니다. 신ㆍ구교 간에 교리적 차이 중에서 두 가지의 중대한 문제가 합일에 상당한 진전을 보았던 것이다. 그 첫째는 교황청과 루터교회 세계연맹의 후원으로 1967년부터 계속해온 양교회간의 대화로 의화문제에 있어서 신학적 난제는 극복했다는 것이다.
즉 개신교의 신앙으로만 의화된다는 주장과 신앙에 업적이 따라야 한다는 가르침이 합일점을 찾았다는 것이다.
이 의화문제는 신구교 간의 근본적 차이점이라는 것을 생각할 때 대단히 큰 발전이 아닐 수 없다. 둘째로는 지난 12월 말에 발표된 성체교리에 대한 의견 일치를 둘 수 있다. 가톨릭과 성공회는 성체 안에 그리스도께서 현존하시다는 데 합의를 보았다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를 과거 역사의 인물로만이 아닌 현재에도 우리와 함께 역사하시고 우리를 하나로 묶을 수 있으시다는 것을 인정하고 믿는 것과 같은 뜻을 가진 교회 일치를 위한 획기적인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국내로 시야를 돌려볼 때 상당한 사건들이 전개되었었다. 공동 번역 신약성서가 출판되었다. 그러나 불행한 것은 이 성서가 가톨릭에서만 애독되고 개신교 측에서는 이단시되고 있다는 점이다. 성서 공동 번역 외에 수차에 걸친 신구교 합동 세미나 및 연구회가 개최되었다. 그런데 1971년에 특별히 괄목할 일은 신구교 합동으로 부정부패 추방 및 사회 정의 구현을 추진했다는 점이다. 이 점에 있어서는 앞으로도 양교 간의 공동 전선을 펴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사회에 헌신할 바가 많을 줄 믿는다.
그러나 아직도 교회일치운동은 피상적이고 부분적이다. 그 원인은 물론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의 신앙이 약하기 때문이라고 생각된다. 우리는 다같은 영ㆍ성신를 받고서도 서로 원수처럼 지내고 있으니 그리스도께 대한 우리의 신앙은 참으로 미약한 것이다.
이제 우리는 교회 일치를 위한 몇 가지 구체적인 방법을 제시하고자 한다. 첫째는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우리 자신의 신앙화에 있다.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깊이 자각해야겠다.
신ㆍ구교인은 다 그리스도를 믿는다. 모두가 그리스도와 일치할 때 그의 사랑으로 생활할 때 우리는 서로 형제이며 한 가족의 맴버가 되지 않겠는가? 과거에는 신ㆍ구교의 신자들은 서로 적대시해 왔었다. 이것은 구미 사람들의 폐습을 그대로 받아들인 데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 현재 구미 사람들은 일치를 모색하고 있는데 우리는 분리해서 살 필요가 어디 있는가?
둘째는 신ㆍ구교 간의 접촉을 자주 해야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서로의 차이점보다 공통점을 발견해서 그 공통점을 바탕으로 우정을 맺어야 할 것 같다. 우리는 다같이 같은 그리스도를 믿고 같은 세례를 받았으며 같은 복음의 정신으로 생활하려고 노력하고 있지 않는가?
셋째로 우리는 서로의 신앙을 통한 생활 경험을 교환할 수 있을 것 같다. 공동 기도회를 갖고 전례를 교환하면 그 성과는 대단하리라 기대된다. 각 본당은 자기 지역 내에 있는 교회를 알고 그 교회의 지도자와의 접촉이 잦아야 할 줄 생각된다.
넷째로 우리는 사회 정의 구현 공동 전선을 펼 수 있을 것 같다.
이 면에 있어서는 이미 상당한 결실을 보고 있지만 우리 사회에 대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공동 책임은 교회일치운동에 큰 성과를 거두게 할 수 있을 것이다.
여하튼 그리스도교가 한국 사회를 위해 공헌할 수 있다면 국민 총화를 이루어 주는 것이다. 그런데 그리스도교 자체가 분리돼 있다면 어떻게 이소정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겠는가? 그렇다고 교회 일치는 인간의 힘으로써만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다. 교회일치운동에 일생을 바치신 꾸뚜리에 신부는『교회 일치는 하느님이 원하시는 때에 하느님이 원하시는 방법으로 이루어져야 한다』고 하셨다. 교회 일치는 하느님만이 이룩할 수 있는 일이다. 우리는 전력을 다하여 이 하느님 사업에 협력해야 하는 것이다. 교회 일치를 위한 기도주간을 맞이하여 교회의 보물이 그 일치에 매여 있음을 깨닫고 교회 일치를 목말라해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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