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모성월인 5월도 짙은 녹음만 남겨두고 소리 없이 흘러가버린다. 내방에 걸려있는 달력에는 목요일마다 3자가 위에서 밑으로 눈에 띄게 씌어져있다. 다름 아닌 성체조배 시간을 본당에서 배정받아 그 시간을 잊지 않기 위해 적어놓은 숫자이다. 목요일이 오면 그 전날은 모든 것을 뒤로하고 알람시계를 2시30분에 맞추어 놓고는 일찍 잠자리에 든다. 아직도 새벽의 공기는 싸늘한데 아무도 오가는 이 없는 도로를 따라서 조배실에서 소리 없이 우리를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찾아 발길을 옮긴다. 조배실의 현관문을 조용히 여닫고 출석부에 ○표를 하고 책장 넘기는 소리도 방해가 될까하여 마음을 쓰면서 조용히 기다리면 먼저 팀이 나온다. 언제나 보는 얼굴들이지만 남들이 모두 잠든 이 때 예수님을 조배하고 나오는 형제자매님들의 얼굴이 그렇게 깨끗하고 다정할 수가 없다. 눈인사를 나누고 조용히 들어가서 잘 정돈되고 깨끗한 온돌방 전면에 모셔져 있는 성체께 엎드려 큰절을 하고 한 시간을 보낸다.
어떻게 기도하며 어떠한 형식이 주어진 것도 아니니 여러 가지 잡념도 오가기도 하고, 때로는 주님과 깊이 만나기도 하면서 한참 지나서보면 나도 모르게 깜빡 잠이 들었다. 깰 때도 있다.
성체를 바라보며 지난 1주간을 무사히 보내고 이렇게 주님 앞에 나올 수 있게 보살펴 주심에 감사드리고 또 한주를 잘 보낼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청원의 기도를 드릴 때도 있다.
처음엔 여럿이 조배를 해 마음도 든든하고 시간을 비울 염려도 없어 좋았다. 오늘은 모두가 깊이 잠들었는지 출석치 않아 나 혼자 성체조배를 하기 위해 홀로 주님 앞에 앉아있어 보니 이렇게 기쁨이 클 줄은 정말 몰랐다.
아무도 보는 사람이 없으니 체면 차릴 필요도 없고 자유로운 상태에서 성체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고 금방 무슨 말씀을 하실 것만 같아 눈은 점점 맑아오고 정신은 한곳으로 모아진다. 그저 만물이 잠든 이 조용한 은총의 시간에 나를 특별히 불러주셨다는 생각에 감사하고 형용할 수 없는 만족감에 사로잡히게 된다. 지나간 모든 일에 잘못된 점, 홀로계신 어머니께 잘못하고 있는 점, 이웃에게 냉정하고 잘못한 점, 남을 나름대로 판단하며 지은 잘못 등을 낱낱이 생각하며 통회의 시간을 가진다.
방의 구석구석을 돌아보니 예수성심상, 성모상, 대건 안드레아 성인상, 성체 앞에 놓여있는 아름다운 꽃들까지도 이 시간이 축복의 시간임을 알려주는 것 같다. 그러나 오늘도 이전처럼 아무 말씀도 듣지 못하고 다시 뒤에 오는 팀에게 자리를 내어주고 조배실을 나와야 했다. 새벽 일찍 도로청소를 하는 아저씨들의 뒷모습을 보면서 집에 돌아와 못다 잔 잠을 다시 청했다. 일어나 하루 일을 시작하면 수면부족 때문인지 하품과 졸음과 피곤함이 몰려든 때도 많다. 내가 좀 더 편한 시간으로 옮겨볼까하는 생각도 들지만 어렵다고 생각되는 시간을 조배하는 것이 조그마한 희생이 되어 지지 않을까 하는 뜻으로 그 생각을 눌러보기도 한다.
우리 본당은 처음 지속적인 성체조배를 실시할 때는 상당히 어려움을 겪었다. 신부님께서 성체조배를 실시할 계획을 세우시고 성체조배 회장을 모셔다가 전 교우가 말씀을 듣고 스카폴라 착의식을 한 다음 자기가 원하는 조배시간의 희망을 받아보았다. 예상대로 하루종일 편리하다고 생각되는 시간은 수가 넘치고 어려운 밤 1시부터 5시 사이는 전혀 희망자가 없는 상태였다. 하루 24시간이 고리모양으로 연결돼야 할 텐데 밤 시간이 끊어지면 처음부터 시작하기가 어려운 일이었다.
사목위원들이 긴급히 모여서 의논하고 우선 이 어려운 시간을 배정받아 자진하여 들어갔다. 시간마다 2~3쌍의 부부가 배정되어 지속적인 성체조배 실시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하여 지금까지 어려움은 있었지만 대부분 자기의 시간을 잊지 않고 찾아와 주님과 함께하고 자신을 조명하는 시간을 갖게 되며 부족한 신앙을 키워가고 있음은 바람직한 일이 아닐 수 없다. 교우들은 밤늦게 놀다가도, 또한 회합을 하다가도, 성체조배 시간이라고 자리를 떠나는 것을 보면 자기시간을 잊지 않으려고 얼마나 노력하는지 짐작이 간다.
세계성체대회를 앞두고 우리 본당에 이렇게 좋은 시간을 갖도록 허락해주신 좋으신 주님 찬미 받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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