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공의 UN 가입과 함께 국제 정치무대에 각광을 받고 등장한 실리외교와 국제 통화 위기를 계기로 그동안 잠세적으로 진행 중이던 탈이데올로기, 신민족주의, 신식민주의가 이제 바야흐로 양성화하고 있다. 또한 정부 수립 이래 형식적인 민주체제에서 빚어진 한국 특유의 정치 생태, 지난 번 세계 주교 대의원회의 때에도 여실히 드러났고 또한 우리 안에서나 주위에서 흔히 겪어볼 수 있는 전진대적인 비민주적 사고방식과 처신은 민주주의에 대한 우리의 회의를 굳혀줄 뿐이다. 이런 판국에 교회의 민주화를 거론한다는 것은 시대 착오가 아닌가 하는 느낌마저 준다.
이러한 일종의 패배감에 현실적인 근거가 아주 없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A. 아우어 교수의 표현대로 우리 시대에 주어진 하느님의 은총이고 보면 교회는 역사 내의 사회적 자기 형상화를 진지하게 모색할 때에 민주주의를 외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두 가지 교회론적 원칙에서 교회의 민주화는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교회는 자유로이 신앙하는 사람들이 동일한 신앙고백과 예배를 위하여 모인 공동체이다.
따라서 교회는 여타의 민주체제가 지향하는 목적을 이미 하나의 현실로서 전제해야만 비로소 성립할 수 있으니 그것은 곧 자유이다.
둘째로 교회는 그 구조상 완전 체제화할 수 없다. 위계적 체제는 교회 구조의 본질적 요소이나 그 전부는 아니다. 교회 내의 여러 가지 카리스마는 성질상 체제화할 수 없으나 위계적 체제 못지 않은 교회의 구조계이고 이는 성신께서 이를테면 직할하신다. 위계적 교회는 체제 외의 개인이나 그룹의 창의와 카리스마를 선시에 감별하여 지도 육성할 의무가 있다. 카리스마와 창의를 혼동해서도 안 되지만 카리스마 외의 일체의 창의를 억압하는 것도 온당치 않다. 교회의 민주화에는 한계가 있다. 가령 교회의 위계적 구조는 신권에 의한 것인데 로마 가톨릭교회의 성원으로 남아 있는 이상 여기에 근본적 이의를 제기할 수는 없다.
다수결 원칙에도 한계가 있다. 소수의 의사를 묵살하거나 경시하는 다수가 교환 원리를 생명으로 삼는 교회 공동체의 의사를 대표하고 그 행동을 결정한다기에는 많은 문제점이 있다. 그러기에 상호 이해와 설득을 위한 정보 교환은 필요불가결의 조건이다. 일체의 조작을 배제하는 매스콤의 책임과 중차대한 것은 이 때문이기도 하며 제2차「바티깐」공의회 때 이루어진 절대다수가 값진 것도 이 때문이다.
교회의 민주화 원칙을 시인하고 그 한계를 분명히 의식하였을 때 실질적인 민주화 작업이 그리 손쉽게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우리는 얼핏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가령「로마」에서는 수삼 년 전부터 전교회를 위한 새 교회법 편찬에 착수하였는데 이에 대한 공청회의 필요성은 누차 역설되었지만 그 효율적인 조직은 아직 실현하지 못한 것으로 알고 있다. 또한 이 새 교회법이 공포되고 교구 내지 전국 단위의 시행령을 제정할 경우 이에 대한 공청회는 가능하며 소기의 목적을 이룰 수 있겠는지 과연 의문이다. 그 밖에도 각급 단위의 평신도 협의체와 사제 평의회, 나아가서는 전국 사목 대의원의 실질적인 민주화와 민주적 운영은 엄청난 과제와 문제점을 우리에게 안겨줄 것이다. 교회의 민주화는 구호로 이루어지는 것은 분명히 아니다. 많은 시간과 인내와 우리 각자의 의식 구조의 변경, 달리 말하면 회개를 요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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