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년수상이라는 제목을 대하니 금년에도 신년이라는 것이 있었던가 싶어진다. 언제부터 이 사회의 시간은 정지되어 있어서 신년수상이라는 글을 쓴다는 것이 억지춘향과 같아서 싱거운 생각이 들기도 한다. 지난해 전반기에는 도도히 흘러드는 세계의 시간에 밀려 이 사회의 시간도 어지간히 속도를 빨리했었는데 후반기를 넘어서면서는 두 시간 사이의 마찰이 심해져서 비틀거리더니 연말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정지되고 말았다. 민가의 시간이 당국의 시간을 예상했던 이상으로 앞질렀던 것이라고나 할까. 회상하고 싶은 것도 많고 회상하고 싶지 않은 것도 많은 한 해였다. 가톨릭에서는 금년을「평화와 정의」의 해라고 하였다.「평화」와「정의」를 그렇게 병렬해 놓으면 달지도 않고 쓰지도 않아 아무 시간도 느껴지지 않는 한 국어에 지나지 않지만 이것을『평화를 원하거든 정의를 위해 일하라』하는 문맥 속에 넣으면 무기체에 대한 유기체처럼 갑자기 시간을 느끼게 한다. 정의가 없는 곳에는 평화가 없다는 것이겠다. 정의가 없는 평화란 질식이고 치욕이고 불의이기도 하다. 정의란 사회 정의이기고 정의를 위하여 일한다 함은 불의와 싸운다는 것이다. 교회는 현실 참여를 하지 않아야 한다는 주장도 있는 것 같다. 종교는 내세를 위한 것으로 죽은 다음의 영혼을 구제하는 것을 본령으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살아 있는 영혼이 부정과 악에 시달리다 못해 그것과 타협하고 거기에 물들어 가고 있어도 교회는 오불관언하고 내세를 위한 기도만 올려 주고 있으면 할 일을 다하는 것이 되니 불의를 행하는 편에서는 이보다 더 고마운 일은 없을 것이다.
불의부정과 싸우는 것도 현실 참여이고 불의부정에 가담하여 이를 행하는 것도 하나의 현실 참여이다. 그럴 때 불의와 싸우는 현실 참여는 삼가야 하고 불의에 가담하여 이를 행하는 현실 참여는 그대로 놔 두라고 하는 것은 우선 형평의 원칙에도 맞지 않지만 그것이 시류나 권력을 추종하는 현실 참여는 해도 괜찮은 현실 참여이고, 시류나 권력에 거슬리는 현실 참여는 삼가야 한다는 의미라면 적어도 종교의 이름으로는 허용되기어려울 것 같다.
가톨릭은 화수회일 수도 없고 동향인 친목회일 수도 없다. 그러한 단체들의 회원은 자기들의 일원이 높은 지위에 오르는 것을 대견하게 생각하고 자랑으로 삼는다. 비록 자기는 그 원직을 불의로운 자리라고 생각하는 경우에도 그 취임 축하에 기꺼이 참석해서 축배를 들기도 한다. 나아가서는 그 명사가 사회의 지탄을 받을 경우에라도 그들의 모임에서는 그런 것은 초월하여 오히려 더 따뜻하게 모시기도 하고 심지어는 그 지탄을 막아 주는 방패의 구실을 해 주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공과 사를 구별한다 하여 공을 저버리는 것이 그러한 단체의 풍속이기도 하다. 그러한 단체는 처음부터 폐쇄적이고 비생산적인 단체이기 때문에 그러한 풍속을 미풍으로 삼든 말든 그것은 그들의 자유라 할 것이지만 교회에 그런 미풍이 숨쉴 수 있는 구석이 조금이라도 있다면「평화와 정의」가 깃들기는 어렵겠고 교회의 시간도 제물에 정지되지 않을 수 없을 것 같다.
지금 같아서는 가톨릭교회는 이 사회의 유일한 소금인 것 같다. 동남아의 어떤 나라들에 있어서는 가톨릭교회가 부정 부패에 항거하는 소리를 억누르는 장비의 구실도 하고 있다는 말이 들려오는 데 이에 비해 퍽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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