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는 치졸하고 일방적인 실용성이라는 척도에 따라 신앙과 교회를 인정하기도 하고 냉소하거나 거부하거나 아니면 박해한다. 가령 교회는 현실생활을 개선하고 평화를 이루고 정의를 실천하고 사회의 분쟁을 해소하고 이 이승살이를 좀 더 견디고 나아가서는 정당하게 향락하면 살아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문화 향상에 이바지하는 바가 상당히 있어야 교회를 인정해 주겠다는 이야기이겠고 그래야만 복음의 증언도 그 실효를 거둘 수 있으리라는 지론이리다.
과연 교회가 인정을 받고 영향력을 발휘하기 위해서 이 모든 것을 해야만 하는가? 이 모든 것 이상의 것을 희망하는 존재라는 점에서 인간의 독창성이 있는 것이 아닐까? 우리 구미에 맞지 않는 진리를 바라고 아무 짝에도 쓸 데 없는 아름다움을 그리워하고 실용과 번미의 차원을 초월하는 거룩한 분을 예배하여야 하지 않을까? 우리가 소비재와 향락재를 제대로 누리자면 바로 이런 것들에서 거리를 취할 수 있을 때가 아닐까? 바로 아무런 쓸모가 없어도 이 문화재권 외에 초연히 존재하시는 분을 외경하고 그분께 스스로를 송두리째 위래할 때에 비로소 우리는 자기 회복을 가기할 수 있지 않을까? 이것이 영원에의 희망으로서의 인간의 진리이다.
현세 도피ㆍ현세 구복위주ㆍ신앙의 상품화ㆍ신앙의 진통제 기능(인민의 아편) 에 대한 비판은 당연하고 우리 신앙이 이렇게 속화하고 타락해서는 안 된다.
또한 가속도적인 세속화 과정이 이른바 그리스도교 특유의 문화적 유형을 거의 잠적하게 한다는 구실로 무위의 영일을 보내서도 안 되겠다.
그러기에 우리는 행동하여야 한다. 여기에서 우리는 몇 가지를 지적할 수 있겠다.
① 온갖 문화적 활동은「꿈」의 실현을 무기한으로 천연하여 현실의 환멸을 위장해서는 안 된다.
② 온갖 구체제와 현실에 대한 형이상학적 부인으로서의 혁명이론은 있을 수없다. 이것은 또 하나의 미래의 절대화가 아니면 실망의 소산이기 때문이다.
③ 문화 향상을 위한 끊임없고 다함없는 노력은 영원에의 희망을 이 역사 안에서 실재적으로 예형화하게 한다. 이것은 하느님이라는 우리의 절대적 미래에 대한우리의 적극적 개방성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④ 지상사물의 적극적 평가라는 전제 아래 이러한 가치들의 자발적 포기는 현세적 희망과 그 실현의 근본적 상대성에 대한 신앙의 증언이다.
그러므로 극기와 금욕은 없어서는 안 될 그리스도인의 생활 요소이다. 이러한 신앙을 교회적 차원에서 즉 가견적이며 우리는 이러한 교회적 현상과 행위를 수도 소명의 핵심이라고 일러서 무방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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